화탁지의 음양오행 성격론 칼럼

오경아 교환일기 대표

[고양신문] 일반적으로 투명함을 긍정으로, 불투명함을 부정으로 인식한다. 한결같음을 긍정으로, 변화무쌍을 부정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중성’이란 단어는 어떠한가? 대부분 부정으로 인식할 것이다. 살짝 바꿔보자. ‘이중성’ 대신 ‘상황에 맞게 대처한다’라는 말로 바꾸면 어떨까?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아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범주가 언어의 범주보다 넓기 때문이다. 언어학자인 소쉬르가 언급한 ‘기표’(표시하는 것)는 ‘기의’(표시되는 것)를 담지 못한다. 언어보다 인간이 먼저 존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통의 불완전함을 종종 느낀다. 아니 자주 느낀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의 정의와 타인이 내리는 정의 사이의 불일치 때문이다. 한 사람이 규정하는 단어의 의미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필터를 거친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성을 띤다.

두 친구가 사주를 보러 왔다. 너무나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 친구는 감정이 너무 풍부해서 문제였고 다른 친구는 너무나 메말라서 문제였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본인에게 없는 서로의 성격을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필자는 이런 특징을 이중성이라 본다. 화기운이 많은 사람은 직설적이고 화끈하지만 반면에 차갑고 침착한 수기운의 특징도 가지고 있다 봐야한다. 뜨겁게 타버리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잠재의식 속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 차갑고 응축되는 특성의 수기운이 많은 사람들은 뜨거운 화기운에 대한 동경과 반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자신에게 부족한 기운을 가진 사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을 갈망하는 반대욕구도 분명히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오행과 음양의 조화가 깨진 생명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살아오면서 너무나 투명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든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너무나 불투명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도 봤을 것이다. 전자는 이중성이 후자보다는 약하다 봐야겠다. 하지만 전자라고 뼈 속까지 투명하기만 할까. 그렇다면 이렇게 탁한 세상에서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상처를 많이 받는 사람도 전자이고 오해를 많이 받는 사람도 전자 쪽이다. 아무리 투명한들 어찌 내 속을 타인에게 다 비출 수 있을 것인가.

적당히 이중적인 사람들은 잘 살아남는다. 그들은 ‘조화로움’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절대적인 잣대란 없다. 적어도 생명체에게는 말이다. 너무나 이중적이어서 마치 꿈틀거리는 벌레를 연상케 하는 이들도 많다. 이들의 이중성은 결과적으로는 본인에게 이득이 되지 못한다. 명리적으로 볼 때, 부족한 것보다는 태과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너무 투명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너무나 이중적인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다. 사는 것은 결국 균형의 문제다.

누구나 자신에게 이중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이중성을 단지 고의적으로 타인을 속이려는 계략으로 보기보다는 오행과 음양을 조절하려는 생명의 본능으로 본다면 어떨까?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측이심’이라는 말이 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과연 어떠한지.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