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 작가

[고양신문] 드디어 사단이 났다. 새벽녘에 울어대는 뭉게가 문제였다. 컴컴한 새벽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짖어대는 뭉게의 소리는 우렁찼다. 주변에서 단잠을 자던 주민들의 잠을 깨기에 딱 좋은 데시벨로 짖어댔다. 도서관에서 밤샘작업을 하다보면 새벽녘에 영락없이 짖어대는 뭉게의 소리 때문에 문을 열고 나가서 뭉게를 진정시키는 일이 많아졌다.

낯선 이를 보면 짖어야하는 개의 본성은 과거 충견의 덕목이었다. 개소리 때문에 도둑들은 그 집안에는 쉽게 발을 들이지 못했다. 주인은 덕분에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도둑이 사라진 도시 골목에서 느닷없이 짖어대는 개소리는 주민들의 신경줄을 자극하는 소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일들이 몇 차례나 벌어지고 난 어느 날 아침, 뭉게가 담장에 목이 졸려 묶인 채로 발견되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늦게 발견되었다면 분명 질식사를 했을 것이다.

누가 이런 잔인한 짓을 했는지 참 몹쓸 사람이라며 동네사람들은 혀를 끌끌 댔지만, 굳이 범인을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가끔 뭉게를 보살피려고 찾아오는 주인집 형님은 여러 차례 개 때문에 잠을 못 잔다는 주변의 불평불만을 들어야만 했다. 형님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뭉게를 데려갈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늙어버린 개를 거두려는 사람은 없었다. 할 수 없이 성대수술을 해야겠다고 나에게 말했다. 아, 뭉게가 목소리를 잃는구나.

수술절차는 간단하고 비용도 많이 안 든다고, 하루 만에 퇴원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인집 형님은 말했다. 다시 목이 졸려 질식의 공포를 맛보느니, 목소리를 잃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낮은 소리로 읊조렸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 반생명적인 조치를 수긍했다. 그렇게 한 생명은 자신의 동의도 없이 성대가 잘리는 조치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뭉게가 수술 받고 돌아온 날, 왠지 기운이 없어보이는 뭉게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뭉게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뭉게가 겪었어야 했을 일련의 과정을 상상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목이 막혀, 헛기침을 몇 차례나 했다. 그날 저녁, 뭉게는 또다시 낯선 이를 향해서 짖어댔다. 하지만 뭉게의 쉰소리는 밖으로 울려 퍼지지 않았고, 소리의 크기도 예전만 못했다. 뭉게는 얼마나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까. 그날 저녁 도서관 골목은 평안히 잠들 수 있었다. 한 생명의 목소리를 없앤 후에 찾아온 어색한 평화였다.

서울 강남역 사거리 CCTV철탑 위에 한 사람이 올랐다.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씨였다. 그는 위태롭게 높고 어처구니없이 좁은 공간에서 뜨거운 햇빛과 차가운 비를 맞으며 50일이 넘도록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는 부당해고 인정과 복직을 요구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한민국은 일본 아베의 만행을 규탄하고, 일본물건 불매운동을 벌이고, 일본여행을 가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었다. 정치권에서는 여야가 격돌하며 이 사태에 대한 대책마련과 책임론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마침 북한에서 쏘아올린 단거리 미사일이 대한민국을 다시 한 번 들쑤셨다.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못했다. 관계부처 장관회의, 기업인 연석회의, 시민들의 자발적 집회가 소집되었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정치적 이익을 계산하고, 기업인들은 이번 기회를 호재(?)삼아 기업에 대한 규제완화와 최저임금의 절하를 요구하며 급히 움직였다.

나는 뭉게를 생각하다, 김용희씨를 생각한다. 목소리를 잃은 뭉게와 목소리가 퍼지지 않는 김용희씨. 그들의 목소리 바깥에서 우리는 소리 없이 오늘도 잠이 든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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