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소개> 『이럴 때, 연극』(최여정, 틈새책방)

공연·문화기획자가 고른 12편의 연극
마음 허기 달래주는 특별한 처방전
희곡의 매력·작가 이야기 흥미진진


[고양신문] 신간 『이럴 때, 연극』(틈새책방 刊)은 표지에 쓰임새를 확실히 밝히고 있다. ‘마음의 허기를 달래 줄 연극 처방전’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특정한 상황이나 감정과 맞닥뜨린 이에게 ‘연극’이라는 특별한 아이템을 제시해준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이에게는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를, 기다림에 지쳐가는 이에게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제안하는 식이다.

처방전을 자처했지만, 사실 글쓴이는 의사라기보다는 요리사에 가깝다. 일반인들이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연극이라는 원재료를 능숙한 솜씨와 안목으로 매만져 명품요리를 차려주기 때문이다. 좋은 요리가 입도 즐겁게 하고 몸에도 유익하듯, 12편의 연극을 식재료 삼아 차려낸 글들은 독자들에게 쏠쏠한 읽는 맛과 든든한 마음의 에너지를 함께 전해준다.

책은 연극이라는 장르에 다가가고 싶은 초보자들에게 친절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교양서이기도 하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등 고대 그리스 희곡에서 시작해 ‘인형의 집’(헨리크 입센)과 ‘갈매기’(안톤 체호프)처럼 현대극의 초석을 놓은 작품, 그리고 ‘에쿠우스’(피터 쉐퍼)와 ‘서푼짜리 오페라’(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오른 명작들을 골고루 다루며 각 작품을 둘러싼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펼쳐낸다.

연극은 물론 영화와 미술과도 접목된 작가의 폭넓은 지식은 장르의 경계를 가뿐히 넘나들며 문화사의 커다란 맥락 속에 자리하는 희곡의 성취와 위상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을 소개하는 도입부에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 왕 이야기,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15세기 화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19세기 화가 제롬의 그림 ‘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등이 등장한다. 이어 18세기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피그말리온’을 오페라 주인공으로 가장 먼저 불러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러한 토양에서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이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고전의 생명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후 할리우드에서 오드리 햅번 주연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또 하나의 걸작 영화로 각색됐다는 사실도 알게 해 준다.

작가는 이야기의 계보를 설명한 후 본격적으로 희곡의 내용과 주제를 분석한다. 여주인공이 자신을 상류층 여성으로 만들어준 교수에게서 벗어나 자의식을 찾아가는 심리적 여정, 그리고 영국 귀족사회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을 짚어낸다. 노벨상과 아카데미상을 동시에 받은 천재이자 인상적인 유머와 독설로 기억되는 조지 버나드 쇼라는 매력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챕터의 말미에 작가가 ‘피그말리온’의 새로운 버전으로 추천하는 ‘리타 길들이기’에 대한 정보는 덤. 이렇듯 풍성한 정보와 시선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는 발랄한 글쓰기가 각 장마다 펼쳐진다.
 

신간 『이럴 때, 연극』을 발간한 최여정 작가.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대상작으로 선정됐다. 책을 쓴 최여정 작가는 경기도문화의전당 공채 1기로 입사한 후 다양한 이력을 쌓은 공연·문화기획 전문가다. 특히 문화계에 신선한 화제를 던져주었던 대학로의 ‘연극열전’을 기획·진행했던 생생한 경험이 책속에 다채롭게 녹아있다. 몇 해 전부터는 일산동구 백석동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사무국으로 매일 출근하며 고양시와의 인연을 쌓고 있다.

바쁜 와중에도 지난해 런던 문화기행 에세이 『세익스피어처럼 걸었다』를 펴낸 데 이어, 올해도 새 책을 통해 남다른 필력과 열정을 선보인 작가는 책 어딘가에서 “희곡 한 편을 쓰지 못해 몇 해를 끼적이고 있는 저에게…”라며 내면을 슬쩍 내비치고 있다. 머잖아 희곡작가의 이름으로 그와 만나는 날을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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