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이웃> 백운대 4700회 등정한 하정우씨

50년 동안 쉼 없이 백운대 정상 찾아
자타공인 가장 많이 북한산 등정한 주인공
“산은 나에게 신앙이고 부모이고 친구”

 

[고양신문] 처음에는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어느 독자로부터 50여 년간 북한산 정상을 4700회 넘게 오른 어르신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머릿속에서 계산이 떨어지지 않았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은 대개 이 산 저 산을 오르게 마련인데 어떻게 1년에 100회 가까이, 그것도 반백년 세월을 주야장창 북한산만 오른단 말인가. 하지만 이 놀라운 기록의 주인공 하정우(87세) 어르신을 문촌마을 자택 부근에서 직접 만나고 나니 비로소 궁금증이 해소됐다. 그에게 있어 북한산 등정은 취미나 단련을 넘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삶 자체였다.

 

북한산 백운대를 4700번 오른 하정우 어르신.

 
가끔 다른 산을 찾기도 했지만, 그의 으뜸 사랑은 오로지 북한산이다. 어느 길로 산행을 시작하든 종착점은 늘 가장 높은 봉우리 백운대를 알현하고 내려왔다. 그렇게 산을 오르며 하정우 어르신은 때로는 자연과 교감하고, 때로는 오래 전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인사를 전하고, 때로는 산이 주는 넉넉한 위로를 얻기도 했다.

하정우 어르신은 북한산을 오를 때마다 꼼꼼한 일지를 기록했다. 4700번의 등정 하나하나가 날짜와 기후, 그리고 산행의 간단한 소회까지 덧붙여져 그의 일지 속에 남아있다. 자타공인, 가장 많이 백운대를 오른 이가 바로 하정우 어르신이다.

그가 백운대를 오른 거리를 합산하면 지구 둘레를 두 바퀴 반 돈다는 계산이 나온다. 300회, 500회, 1000회, 3000회…, 의미를 부여할 만한 산행을 마치고는 산복(山福)의 기쁨을 한없이 누리게 해 주신 커다란 존재들에게 감사를 고하는 마음을 담아 시편을 남기기도 했다. 백운대 등정 3500회를 맞아 쓴 ‘여생(餘生)도 변함없이 산길 탔으면’이라는 시를 읽어보면 북한산을 대하는 그의 마음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어떻게 무엇으로 이 홍복(洪福)을 감사하리/ 부모님 모시듯이 정성 다해 공수경배(拱手敬拜)/ 한 잔 술 흠향(歆饗)하시고 더 큰 사랑 베푸소서/(중략) 제 욕심 과하거든 모진 고통 더 주시고/ 게으름 피울 때면 호된 채찍 가하소서/ 애산심(愛山心) 흐트러질 땐 길 헤매게 하소서/ 지쳐서 쓰러지면 끌어안아 주시고/ 활기(活氣)찬 산행(山行)때면 칭찬하여 주소서/ 감사의 기도드릴 땐 부디 축복 주소서(하략)’
 

일산 문촌마을 자택 인근에서 만난 하정우 어르신.

▲ 삼십대 후반 시작된 북한산과의 인연

1933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하정우 어르신은 1953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약관(20세)의 나이에 공직자의 길을 시작했다. 6·25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 정부의 조직과 역할이 겨우 정비되던 시절이었다. 이후 정당 정책연구실장, 장관실 관리관, 국회 수석전문위원 등을 지낸 후 50대에는 한국증권거래소 전무이사 등을 두루 거치며 행정·정책 전문가로서 폭넓은 이력을 쌓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무작정 찾은 곳이 가까운 북한산이었지요. 산에 들어서니 공직생활에서 오는 압박과 삶에 대한 공허감이 치유되더라구요. 산은 새로운 세계였죠.”

이후 그의 삶은 직장과 가정에서의 시간을 빼면 오로지 북한산과 함께였다. 당시만 해도 등산인구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등산복을 걸치고 배낭을 메고 버스에 올라타면 승객들이 흘끔거리며 쳐다보곤 했고, 등산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북한산 구석구석을 새 길을 찾아가며 걷다가 사람의 흔적이라도 눈에 띄면 ‘혹시 공비가 왔다 간 게 아닐까’ 긴장부터 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소위 김신조 루트가 지나간 송추와 고양 쪽의 북한산은 통행이 철저히 제한되다가 88올림픽을 전후해 하나 둘 등산로가 개방됐다. 덕분에 1994년 일산으로 이사를 온 후에는 북한산성입구에서 산행을 시작해 백운대 등정 숫자를 늘려나갔다.
 

50년 산행의 기록을 담은 저서 『50년 산길의 편안한 행복(幸福)』. 올해 2월 출간했다.

▲ 50년 산행의 흔적 책에 담아

하정우 어르신은 자신의 산행기를 꼼꼼히 일지와 시조로 남겼다. 이러한 기록은 3번에 걸쳐 책자로 묶였는데, 1987년에 발행한 『산정무한(山情無限)으로 엮은 애산송(愛山頌)』 그리고 1993년과 올해 발행한 『50년 산길의 편안한 행복(幸福)』이 그것이다. 책에는 하정우 어르신의 삶과 더불어 북한산의 50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판을 목적으로 한 책은 아니지만, 제 스스로 몇 가지 의미를 담았습니다. 유달리 많은 산행의 복을 누리게 해 주신 천지신명께 감사를 올리고, 하늘에 계신 부모님에게 내 생활을 고해드리고, 산행에서 만나 정을 나눈 벗들과의 우의도 다지고 싶었습니다.”

책에 실린 여러 장의 삽화는 한국 추상화의 대가 하인두 화백의 작품들이고, 제호는 서예가 배종순의 글씨다. 소박하지만 한 시대의 흔적이 담긴 소중한 출판물인 셈이다.

올해 발행한 책의 서두에 실린, 백운대를 4680회 등정한 후 적어놓은 서문에는 ‘지치거나 실의에 빠질 때 내 산 사랑의 반생(半生)을 거울삼아 자연을 가까이하며 활기차게 재기하기를 바란다’며 후손들을 향한 애틋한 정도 표하고 있다.

 

▲ 멀리서도 북한산 보이면 마음 든든

북한산이 왜 그렇게 좋냐는 질문을 던지니 하정우 어르신의 맑은 눈빛에 설렘의 기운이 감돈다.
“맨 처음 백운대를 오르던 날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해요. 인수봉과 백운대의 힘차고 우람한 봉우리가 내 마음을 압도했지요. 후에 다른 명산들도 다녀봤지만, 바위 하나가 통째로 죽순같이 불끈 솟아올라 하나의 봉우리를 이룬 산은 북한산밖에 없더군요. 북한산의 당당한 위용은 인간의 작은 마음을 평안하게 압도합니다.”

북한산의 숨은 명소가 있으면 알려달라는 기자의 어리석은 질문에 그는 지혜로운 대답으로 가름한다.
“북한산은 수없이 찾아가도 매일 다른 느낌을 전해줍니다. 맑은 날은 맑은 대로, 흐린 날은 흐린대로 좋지요. 특정 장소의 매력을 찾지 말고 산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 자체를 편안하게 누리는 산행을 하시기를 바라요.”

그는 마치 맑은 정령을 대하듯, 북한산 품속의 나무와 바위에게도 존대를 하며 말을 건네곤 한단다. 또한 고양에서건 서울에서건 아무 때든 고개를 들어 북한산을 찾게 되고, 타지에 갔다 돌아올 때도 북한산이 시야에 들어오면 마음이 푸근해진다고 한다.
 

하정우 어르신의 벗들인 ‘백운대 형제들’. 왼쪽부터 명산(明山) 김성곤, 범산(凡山) 이형기, 두산(斗山) 하정우, 인산(仁山) 이창우.

▲ 산에서 만난 벗들과 쌓은 귀한 인연

젊어서부터 홀로 산을 찾았지만, 수 천 번을 오르다 보니 자연스레 귀한 인연들도 만났다. 지난해 초 세상을 떠난 백운산장 주인장과도 오래도록 깊게 교유했다. 핸드폰도 사용하지 않는 그는 누군가와 인위적으로 약속을 잡는 일이 드물지만, 백운대가 자연스레 약속장소가 돼 주었다.

“저처럼 백운대를 자주 찾는 이들이 있어요. 따로 약속을 안 해도 정상에서 자연스레 마주치는 것이죠. 가장 많이 만난 이는 백운대에서만 1000번이 넘게 만난 것 같아요. 인연도 이런 인연이 없는 셈이죠. 몇몇 산우들과 자칭 ‘백운대 형제들’로 지내고 있는데, 인산(仁山), 범산(凡山), 명산(明山), 수산(壽山) 등 각자 산(山)자가 들어간 호를 지어 서로를 부르곤 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력을 드러내거나 자랑하는 법이 없지만, 주변의 지인들은 하정우 어르신의 깊은 내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백운대 형제들이 하정우 어르신을 부르는 호칭은 ‘두산(斗山)’이다. 백운대 형제들 중 한 명인 고양의 지역 원로 이창우(80세)씨는 “두산 선생은 존재 자체로 북한산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말한다. 두어번의 만남을 가졌을 뿐이지만, 기자 역시 이창우씨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을지로 수제 등산화 가게, 몇 권 안 되던 안내책자, 초창기 등산지도, 90년대 등산인구의 팽창, 무분별한 등산행태 확산과 자정 노력 등 그가 회고하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지난 50년 우리나라 등산문화의 변천사였고, 산을 바라보는 깊고도 맑은 마음이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 오른 하정우 어르신(사진 오른쪽). 함께 오른 이는 고양의 지역 원로 이창우씨.

▲ 한 그루 소나무의 운명을 애도하며…

그는 최근 겪은 마음 아픈 일 하나를 기자에게 들려줬다.
“백운대 산정에서 350m가량 내려온 곳에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노송 한 그루가 있어요. 척박한 환경에서 모질게 버티며 둘레가 180cm 넘게 자란, 수령이 150년은 되어 보이는 나무입니다. 고결하고 당당한 풍채가 너무 좋아 지날 때마다 나무를 조심스레 감싸 안곤 했지요.”

하정우 어르신은 그 나무를 마치 부모님 대하듯 여기며 깊은 위로를 얻곤 했단다. 그런데 언젠가 거친 바람에 그만 나무뿌리가 들려버렸다. 깜짝 놀란 그가 국립공원관리공단 사무실을 찾아가 지주를 세우고 흙을 복토해 나무를 살려야 한다고 호소했지만,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결국 지난해 여름 무서운 폭염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말라죽었다. 비록 한 그루의 나무에 불과했지만, 이 사건은 하정우 어르신의 마음에 깊은 상실감을 남겼다.

“우리보다 훨씬 오랜 시간 북한산과 함께 한 나무가 숨이 끊어져 가는데 사람들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마치 내 가까운 피붙이, 또는 마음을 나눈 벗이 쓰러진 것처럼 눈물이 쏟아지더라구요.”
그는 ‘비명(非命)으로 쓰러지고 만 바윗들 노송(老松)앞에서’라는 글을 적어 책 속에 남겨놓는 것으로 한 그루 나무를 애도하는 예를 표했다.

하정우 어르신은 최근 백운대 등정 주기가 조금 뜸해졌다. 거동이 불편해진 아내 곁을 지키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은 매일같이 산길을 오르고, 백운대 정상에 올라 북한산의 정령을 알현한다. 그의 마음이 올해 2월에 쓴 ‘회상(回想)의 등산(登山)길 오가며’라는 글에 잘 표현돼 있다.

‘산 좋아 산 타면서 무한산정(無限山情) 쌓게 되매/ 부모님 뵈옵듯한 일체감은 천생연분(天生緣分)이리// 그 품에 노닐노라면 동심(童心)으로 돌아가네/ 언제고 생활속에 산을 품고 사노라니/ 몸뚱이야 산 품에선 한줌 흙도 안 될지나/ 영혼(靈魂)은 수많은 태산(泰山)도 너끈히 담아내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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