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그림책으로 본 세상> 『왜요?』

[고양신문] “관장님, 화장실 가도 돼요?” “뭐라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니?” “그럼 누구한테 물어봐요?” 아이는 난처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냥 가라고 하면 될 텐데 문득 궁금해졌다.“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갈 거야?” “….” 더 곤란하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 얼른 다녀오라고 했다. 그제야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 가는 아이.

왜 그랬을까? 지금이 학교 수업 시간도 아니고, 더군다나 혼자서 책을 읽다가 굳이 데스크에 앉아있는 나에게 와서 묻는 이유가 궁금했다. 화장실에 다녀온 아이에게 웃으며 물었다.
“여기서는 그냥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해도 되는데 왜 화장실 가도 되냐고 물어봤어?” “그냥 가면 혼날까 봐요.” 아이의 답에 한 번 더 놀랐다. ‘혼. 날. 까. 봐.’

몇 년 전부터 아이들 질문이 부쩍 늘었다. 뭔가 궁금해 하고 물어본다는 건 굉장히 고무적이다. 하지만 내용이 문제였다. 거의 대부분 “이거 해도 돼요?”이기 때문이다. ‘이거 동그랗게 오려도 돼요?’, ‘이거 먹어도 돼요?’, ‘이거 갖다 버리면 돼요?’, ‘이거 빌려가도 돼요?’ 이런 식으로 정해진 답에 허락을 바라는 질문뿐이었다.

『왜요?』(린제이 캠프 글, 토니 로스 그림, 베틀북)

여기 하루에도 몇 번씩 ‘왜요?’하고 묻는 아이가 있다.
『왜요?』(린제이 캠프 글, 토니 로스 그림, 바리 옮김, 베틀북)에 나오는 릴리이다. “그거야 네 바지가 젖을까봐….” “왜요?” “그야 어제 비가 와서 잔디가 젖었으니까.” “왜요?” 아빠는 대부분 친절하게 대답해주지만, 하루 종일 묻는 릴리에게 가끔은 너무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래도 릴리는 묻고 또 묻는다. “왜요?” 그러던, 어느 날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외계인이 찾아온다. “지구인들아, 우리는 너희를 정복하러 왔다.” 모두가 무서워 벌벌 떨지만 릴리는 또 물어본다. “왜요?” 릴리의 질문에 대답해주던 외계인들은 문득 깨닫게 된다. 자신들 역시 황제가 시켜서 왔을 뿐 실제로는 지구를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걸. 그래서 외계인들은 고향별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질문’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나에게 하는 질문과 릴리의 질문은 좀 다르다. 아이들 질문의 목적이 정해놓은 답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릴리의 질문은 좀 더 근원적이다. ‘네, 아니오’를 구하는 질문에 비해 ‘왜요?’는 맥락을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맥락을 묻는 질문은 ‘진실’을 맞이할 확률이 높다. 질문에 답하다가 보면 스스로 답을 찾게 되는 것. 원래 질문은 대답하는 사람을 통해 답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답을 얻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이 필요하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이시도어 라비는 “자녀가 학교를 다녀오면 대부분 ‘오늘은 뭘 배웠니?’라고 묻지만,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오늘은 선생님께 어떤 좋은 질문을 했니?’ 그게 나를 과학자로 만든 힘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최고의 질문이 아닌가 싶다. ‘너는 오늘 어떤 좋은 질문을 했니?’

문득, 여러 장면이 스치고 지나간다. 밤새 텔레비전을 달구던 어느 기자 간담회와 또 어느 청문회 장면들이다. 몇 시간에 걸친 기자 간담회를 지켜보면서 물 한 모금 없이 밤고구마 100개를 꾸역꾸역 먹은 듯한 답답함.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켜봤던 청문회는 결국 소화불량을 일으켰더랬다. 공통적으로 들었던 생각은 어쩌면 저렇게 ‘질문을 못 할까?’였다. 질문하는 사람이 좋은 질문을 못하니, 아니 심지어 질문을 하라는데 주장만 하니 좋은 답이 나올 리 없다. 질문자가 원하는 답을 정해놓고 그 답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질문은 이미 질문이 아니다.

박미숙 책과도서관 대표/ 책놀이터 작은도서관 관장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만약 내게 한 시간 동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면 난 55분을 훌륭한 질문을 찾고 결정하는 데 보낼 것이다.”
좋은 질문을 찾기 위해 어떤 공을 들이고 있는가? 나에게도 질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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