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애 칼럼 <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

[고양신문] 가까운 미래, 국가에서는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국민을 통제한다. 바로 책을 모두 없애 버리는 것. 독서는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책을 몰래 갖고 있는 것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방화수(fireman)’를 통해서 발견 즉시 모두 불태워 버린다. 그리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등의 미디어를 통해서 사람들을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문화에 중독시킨다. 이 세계의 시스템에 그 어떤 불만이나 의문을 갖지 못하도록 말이다.

『화씨 451』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밀드레드’는 그 세계의 수레바퀴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거실 삼면(三面)을 꽉 채운 텔레비전을 하루 종일 시청한다. 꿈속에서도 헤드폰을 끼고 라디오를 듣는데, 그것이 그녀의 잠을 유도하는지 방해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종종 수면부족 상태에서 수면제를 과다복용 한다. 그러다가 한번은 위세척을 한 적도 있는데, 다음날 그것조차 그녀는 기억을 못한다. 반면 밀드레드의 남편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인 ‘몬태그’는 미디어와 첨단 기계에 친숙하지 않다. 게다가 그는 방화수이다. 어쩌면 방화수라는 직업 때문일까? 직접 책을 불태우는 경험을 수없이 접하면서 그는 이 시스템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정부는 왜 책을 없애는가?’, ‘책은 정말 해로운 것인가?’

『화씨 451』는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1953년에 출간한 소설이다. ‘분서갱유’를 소설로 다룬 것은 그가 처음이 아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이 그보다 몇 해 전 1949년에 출간됐다. 『1984년』에서는 ‘분서갱유’ 차원을 넘어서 책을 가공, 편집, 확산시켜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는 당의 슬로건 아래에서 말이다. 이것은 ‘현실 통제’이고, 그들이 만든 신어로는 ‘이중 사고’이다. 심지어 당은 사전을 새로 편찬하면서 언어를 끊임없이 단순화한다. 접두사 un을 붙여 어떤 단어든 부정어로 만들 수 있다거나 접두어 ful을 사용해서 명사를 형용사로 활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knife라는 명동사가 칼, 날카로운, 뾰족한 등의 모든 뜻을 대신하기도 한다. 언어가 줄어든 만큼 사고의 폭도 좁아진다는 것을 알기에 신어 사전을 편찬한 것이고, 이 논리적 체계를 만들어, 작가는 부록으로 정리해 놓기까지 했다. 자세히 읽다 보면 소름 끼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

이렇게 보자면 책은 권력자들 입장에서 봤을 때 무서운 도구이지 않은가. 『화씨 451』의 은둔한 교수 파버의 말을 빌리자면, “책들은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숨구멍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이는 삶의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런데 골치 아픈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저 달덩이처럼 둥글고 반반하기만 한 밀랍 얼굴을 바란다. 그게 바로 지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참모습”이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쿠데타를 통해서 책을 통째로 소각해 버리고, 역사도 왜곡한다.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시속 100마일의 속도로 차량을 운행시키고, 가만히 앉아서 하릴없이 오락이나 즐기거나 거실에 앉아 토론 없이 일방적으로 벽면 텔레비전의 말에만 귀 기울이도록 유도시킨다. 책은 ‘공상 또는 허상’이고, 텔레비전이 마치 ‘현실’인 것처럼. 그건 즉각적이고, 말초적이라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내 주변과 별 다를 바 없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사방을 꽉 채워서 텔레비전이 설치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밀드레드가 텔레비전을 하나 더 설치해 달라고 졸랐던 것이고. 그게 곧 ‘현실’이니까. 사람과 ‘대화 또는 소통’ 따위는 없다.

김민애 기획편집자/ 독서동아리 활동가

『1984년』의 윈스턴은 거대한 당에 대항하다가 ‘개인의 승리’로 끝을 맺지만, 『화씨 451』은 는 그보다 좀 더 나아가서 문제의식을 가진 방화수 몬태그가 방화서장을 죽이고, 쫓기는 몸으로써 ‘책 방화수’ 집단을 만나 ‘미래 또는 내일’을 도모하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책 방화수’ 개개인은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운, 일종의 ‘사람책’이다. 책이 발각되면 불태워질 수 있으므로, 외운 다음 스스로 책을 불태운다. 이들은 파버 교수의 말처럼 ‘양질의 책’으로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사람 간에 서로 ‘상호작용’을 해 가며 생각을 교류한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고, 그들 세상의 미래이다. 책이 금지되고 인간의 생각이 통제된 그들의 사회가 어둡지 않은 이유다. 내가 독서모임에 중독되어 현재 8개씩이나 참여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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