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스피노자는 주인과 노예를 구분하면서, 능동적 존재를 주인으로, 수동적 존재를 노예라 명칭했다. 쉽게 말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존재는 주인이고, 남이 시키는 걸 하는 존재는 노예다.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해보면, 자본가에게 고용된 사람들은 모두 노예가 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율적으로 결정해 실행하는 자가 아니라, 회사가 원하는 것을 타율적으로 수용해 노동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벌어먹지 않는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 신세를 모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편 자본주의 사회의 슬로건 중에 ‘손님은 왕이다’가 있다. 상품을 생산하는 자는 노예인데, 상품을 소비하는 자는 왕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을 구매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환영한다. 왕처럼 대접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예가 되고 싶은가, 왕이 되고 싶은가. 너무도 자명하지 않은가? 누구나 왕이 되고 싶어한다. 무한 지불능력이 있다면 왕권은 무한할 것이다. 한 사람이 일할 때는 노예처럼 취급되다가, 소비할 때는 왕처럼 대접받는다면, 그는 어디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둘 것인가? 당연히 소비자의 위치일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돼 있었던 노예제 사회에서야 이러한 상태가 정신분열을 일으키지 않겠지만, 생산자와 소비자가 한 몸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정신분열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적 가치에 충실한 한 우리 모두는 정신분열자다.

그나마 직장이 있는 노동자들은 나은 편이다. 가정주부는 지불되지 않는 가사노동을 노예처럼 하다가, TV에 나오는 홈쇼핑의 상품을 보면서 핸드폰을 누를 때는 왕이 된다. 학생들은 지불되지 않는 학습노동을 노예처럼 하다가, PC방에서 게임을 할 때에는 왕이 된다. 맨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이 순환고리의 재생산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행한다. 미친 사회다. 이 사회 구조 자체가 정신병동이다. ‘생산은 노예 같이, 소비는 왕 같이!’ 정신병동 입구에 쓰여진 슬로건이다.

노예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왕이 되고 싶은 사람은 넘쳐 난다. 그러나 노예가 되었든 왕이 되었든 민주주의 사회의 모델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노예제를 폐지하고, 왕정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이룩됐다. 민주주의 사회의 주인은 노예도 왕도 아닌 평민이다. 그러니 민주주의가 그나마 괜찮은 가치라고 여겨진다면, 노예뿐만 아니라 왕도 폐지돼야 한다. 짓밟혀서도 안 되지만 군림해서도 안 된다.

지배 당하는 자도, 지배하는 자도 없는 평민 사회의 이상적 모델이 역사적으로는 불가능의 영역이겠지만, 그 불가능성의 영역을 우리의 삶으로 초대해 실패를 전제로 하는 실천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 현재 세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이슈 중에서 ‘보편적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노예제 폐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태어난 자는, 그가 어떠한 조건에서 태어났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 행복추구권은 상황이 나아지면 획득되는 권리가 아니라, 상황과 관계없이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권리이다. 자신의 삶의 행복을 위해 노동할 권리뿐만 아니라, 행복을 침해하는 노동을 거부할 권리도 담고 있다.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 모든 국민에게 생존이 가능한 조건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그것을 최소 수준으로 보장하는(최대가 아니다!) 하나의 물질적 표현이자, 인간의 노동이 노예노동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최저의(최고가 아니다!) 안전망이다.

왕의 지위를 항구적으로 보장받는 경제적 특권층의 과잉권력이 이제는 노예적 지위로 전락할 가능성이 항구적으로 드러나는 평민들의 안정적 권력으로 대체돼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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