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 경기 기본소득당 창당준비위원장

[고양신문] 고양시로 보금자리를 옮긴지 7년이 되던 날, 원흥으로 이사했다. 새로 생긴 국민임대주택에 당첨되었기 때문이었다. 2년 마다 한 번씩 재계약을 해야 하지만 최대 30년까지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이 생긴 것이다. 내 것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좋았다. ‘내 집 마련’은 애초에 포기한 꿈이었다. 터무니없이 월세를 올려 쫓겨나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는 집을 얻으니 성공한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다.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집 문제가 해결이 됐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오래 살 수 있는 집이 가져다주는 변화는 컸다.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그동안 집이라는 공간이 언제나 옮길 수 있는 곳이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옮기지 않고 오랫동안 살 수 있는 집이 생기니 애정이 생겼다. 중고로 들였던 낡은 가구와 가전제품을 모두 새 것으로 바꿨다. 남들은 신혼살림 차린다고 할 만큼 혼자 사는 집에 잔뜩 변화를 주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몰랐다. 방바닥과 가구를 쓸고 닦는 시간이 늘어났다. 자연히 주방에 머무르는 시간도 늘어나 먹을 수 있는 반찬이 상시대기 중인 냉장고 상태를 유지했다. 집이 깨끗하고 항상 먹을 게 있는 집을 만들어 놓으니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집에 손님을 초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동안 신세를 졌던 사람에게 빚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초대를 시작했다. 고마웠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음식을 하고 손님맞이 청소를 하는 것도 전혀 귀찮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다는 감각은 나를 충만하게 했다. 몇 차례 집들이를 하고, 식당에서 밥을 사먹는 것보다 도시락을 싸는 햇수가 많아졌을 때, 또 누군가를 초대했다. 그와의 인연은 5년이 넘었다. 세월호 참사로 안타깝고 추모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어 화정역 광장에 자리를 잡았을 때 그와 함께 추모하면서 처음 만났다. 어느 날, 그가 도움을 청했다.

28살의 그는 취직이 걱정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지 못했던 그는 오랫동안 다녔던 태권도 체육관에서 보조교사를 했던 것이 가장 오래 일한 경력이었다. 그는 청년구직을 지원하는 다양한 정책을 몰랐다. 처음 안내했던 것은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가서 상담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내일배움카드, 취직성공패키지 등 지원해볼만 한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너무 어려웠다. 한글맞춤법이 어려운 그에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일은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었다.

딩동, 벨 소리가 들려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도 반갑게 인사하며 집에 들어섰다. 최근 입양한 고양이와 인사하고 있는 그에게 친구 집에서 친구가 해준 밥을 먹은 적이 있느냐 물었다. 그는 한 번도 친구 집에 놀러간 적이 없다고 답했다. 한글맞춤법을 어려워하고 깊은 대화가 어려웠던 그는 종종 친구관계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하곤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함께 밥과 과일을 먹으며, 지난 8년 동안 그가 했던 알바 경력을 들으며 자기소개서를 함께 작성했다. 같이 이야기 나누면서 그가 바리스타 교육을 받고 싶다는 것도 새롭게 알았다.

그를 배웅하면서 되돌아보니 내 집이라는 공간에 허물없이 누군가를 초대하여 도움을 준 적이 거의 없었다. 내 안의 불안정함이 일부 사라지고 나니 베풀 수 있는 힘이 커진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누구나 약속할 때, 가장 우선 되어야 할 것은 불안을 거두는 정치이지 않을까. 집이든, 기본소득이든, 누구에게나 나눌 수 있는 힘이 주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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