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전진하지 않고 돌아가기만 하는 쳇바퀴가 있다. 쳇바퀴 속에는 수많은 다람쥐들이 있다. 다람쥐들은 앞으로 전진한다고 믿고 달린다. 그러나 쳇바퀴는 단 한 발자국도 이동한 적이 없다. 가장 앞서고자하는 다람쥐는 맹렬한 속도로 쳇바퀴 안쪽을 달린다. 걸치적거리는 다람쥐들을 짓밟고 달려나간다. 그의 맹렬한 속도에 놀란 다람쥐들이 그를 숭상하며, 그의 몸놀림을 따라한다. 수레바퀴의 회전속도는 이전과는 다르게 빨라진다. 앞선 다람쥐 덕분이다. 그를 따르는 다람쥐들 덕분이다.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다람쥐들은 넘어져 피를 흘리며 신음한다. 하지만 달리는 속도를 멈출 수 없기에, 그 다람쥐들을 뒤로 한 채 다른 늦은 다람쥐들이 빠른 다람쥐들의 달음박질을 헉헉대며 따라 간다.

한 다람쥐가 넘어진 다람쥐를 일으키려 속도를 줄인다. 그는 안간힘을 써가며 쓰러진 다람쥐를 일으켜 세우려 한다. 옆에서 달리던 다람쥐들이 이를 지켜보며 달려나간다. 비웃는 다람쥐들이 있는가하면, 속으로 미안해하는 다람쥐들도 있다. 쓰러진 다람쥐를 일으켜 세우려는 다람쥐가 방해가 된다며 그를 짓밟고 달리는 다람쥐들도 있다. 그러다가 다른 한 다람쥐가 자신의 속도를 줄이며 다른 쓰러진 다람쥐를 일으켜 세우려 한다. 서도주의(鼠道主義)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두 마라의 다람쥐가 속도를 줄이는 것을 보고 몇몇 다람쥐들이 속도를 줄인다. 그러다가 맹렬히 달려오는 다람쥐들에게 부딪혀 쓰려지기도 한다.

속도주의(速度主義), 그것은 수레바퀴의 법칙이다. 앞서 달리는 다람쥐들을 진보라고 표현하든, 쓰러진 다람쥐를 일으켜 세우려는 다람쥐들을 퇴보라고 표현하든, 앞서 달리는 다람쥐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보수라고 표현하든, 속도를 줄이는 다람쥐를 서도주의가 넘치는 진보라고 표현하든 상관없다. 속도주의를 기본룰로 삼고 있는 한 진보와 퇴보, 보수와 진보는 별 차이 없다. 앞서 달리는 다람쥐들은 숨을 헐떡이며 심장마비에 걸릴 지경이고, 쓰러진 다람쥐들은 이미 피투성이며, 속도를 줄여 이를 수습하려는 다람쥐들 역시 밀리고 치여 쓰려질 지경이다.

앞서 달리는 다람쥐가 헉헉대며 외친다.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달한다. 뒤쫓던 다람쥐들은 이 외침에 얼마 남지 않은 용기를 내기로 한다. 쓰러진 다람쥐들은 ‘다람쥐 살려’라고 단말마의 비명을 외치고 죽는다. 그 다람쥐를 일으켜 세우려던 다람쥐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애도기간을 선포한다. 이 선포로 몇몇 다람쥐들이 속도를 줄인다. 달리는 다람쥐들은 이 사태를 지켜보지만,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달리지 않으면 자신도 죽게 될 것이라는 공포가 그의 달음질을 재촉한다.

제일 앞서던 다람쥐가 자신의 속도를 못 이기고 고꾸라진다. 뒤따르던 다람쥐가 그의 머리를 짓밟고 앞서 나간다. 첫 번째 다람쥐가 고꾸라지는 것을 본 다른 다람쥐들은 공포와 더불어 흥분에 사로잡힌다. 영원히 일등일 것 같았던 위대한 다람쥐는 이미 사라졌다. 그렇다면 누구나 일등이 될 수 있다. 지금 제일 앞서는 다람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뒤에 있었던 놈이다. 조금만 더 빨리 달리면 내가 제일 앞에서 달릴 수 있다. 그렇게 달리고 달리는 사이에 꽤 많은 다람쥐들이 죽어나갔다. 이제 경쟁률이 낮아졌다. 해볼 만하다.

몇몇 다람쥐들이 이러한 사태를 관찰하며 서문학(鼠文學)적 글을 달리며 써댄다. 다람쥐의 삶은 도전과 응전의 결과라고, 피할 수 없는 삶은 즐기라고, 넘어지지만 일어서야 한다고, 아프니까 다람쥐라고, 요즘 다람쥐들은 꿈도 없다고, 게을러서 문제라고!

다람쥐들이 달리는 한 쳇바퀴는 멈추지 않는 것을 모른 채. 속도주의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모른 채, 쳇바퀴 밖에는 광대한 자연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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