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뭉게는 아직 살아있다. 하루종일 굵은 목줄에 매달려 차가워진 밥을 아득아득 씹어먹으며, 먼지로 더럽혀진 물통의 물을 핥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뭉게의 산책은 이제 내 몫이 아니다. 나는 도서관에 도착하여 뭉게에게 인사를 하고 밥이나 물이 떨어지지 않았나 살피는 것이 고작이다. 뭉게의 산책은 도서관 지하 봉제공장 아주머니의 몫이 되었다. 점심녘이 되면 식사를 마친 아주머니가 뭉게의 목줄을 풀어 산책을 시킨다. 그 아주머니가 목줄을 푸는 순간, 낡아가던 뭉게는 활력을 찾는다. 펄쩍펄쩍 뛰며 주위를 맴돌고, 꼬리를 힘차게 돌린다. 야, 산책시간이다.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뭉게의 걸음걸이는 위풍당당하다. 비록 똥개지만 그 품격은 하늘을 찌른다. 늙은 몸에서 어찌 그런 에너지가 방출되는지 놀랍다. 저 걸음걸이를 내 나이 80이 되었을 때, 닮을 수 있을까? 보일러도 없이, 방한복, 방한화도 없이 추운 겨울을 바깥에서 지내면서도 감기가 안 걸린다. 뭉게의 건강비결은 무엇일까? 저 야생성의 양생법을 배우고 싶다.

하지만 주말이 되면, 지하 봉제공장은 쉬고 아주머니도 출근을 하지 않으니, 뭉게는 종일 묶여있게 된다. 이때가 내 미약한 측은지심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시간이다. 주말에 도서관에서 출근하여 밀린 원고를 쓰다가도, 괜히 바깥이 신경쓰인다. 뭉게가 묶여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밀린 원고에 박차를 가해야함에도 나는 왠지 미안하다. 그럴때면 만사를 재쳐놓고, 뭉게의 목줄을 풀러 밖으로 나간다. 그러면 뭉게는 귀신 같이 안다. 이 양반이 쓰다듬어 주거나 물을 갈아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산책을 시키려고 오는 것임을. 뭉게의 몸짓과 꼬리돌림만 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오랜만에 뭉게와 함께 걷는 길은 신선하다. 뭉게의 발걸음에 맞춰 걸어가는 일은 나의 삶에도 활력을 불어넣는다. 만사를 제쳐두고 나오길 잘했다. 뭉게는 그냥 막무가내로 걷지 않는다. 그의 걸음은 세심하게 나눠져 있다. 아스팔트길은 당당하게, 주변에 나무가 있으며 살살, 낙엽이 쌓인 공원으로 들어서면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그의 눈과 코와 귀는 항상 열려있다. 주변을 관찰하고, 차분히 냄새 맡고,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에 반응한다.

걸음명상이 가능하면 바로 이런 것이리라.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온전히 현재의 순간을 음미하는 삶. 뭉게가 나무나 꽃이나 풀이나 낙엽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을 때면, 영양분은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코로도 흡입할 수 있구나 생각이 들 정도다. 예전에 어떤 선사는 대지의 공기만으로도 영양분을 흡수하여 살 수 있다고 했다는데, 뭉게의 경지가 거기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뭉게의 명상법이 신기해, 뭉게를 따라 나도 풀들이나 나무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다. 개의 후각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나름 신선한 경험이었다. 뭉게가 아니었던들 어찌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땅에 대고 냄새를 맡아볼 생각이나 했겠는가.

에크하르트 톨레는 『이 순간의 나』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호흡을 느껴보세요. 들이마시고 내쉬는 공기의 흐름을 인식하세요. 그리고 당신 내면의 에너지 장을 느껴보세요. 당신이 해결하고 처리해야 할 모든 것은 마음의 상상이 투영된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 뭉게와 함께 발맞춰 산책하는 이 순간, 과거가 만들어놓은 온갖 걱정이나 미래를 상상하며 새겼던 온갖 기대를 내려놓고, 나는 뭉게와 더불어 온전히 자연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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