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삶은 활력이다. 본능이고 충동이다. 움직임이고 변화다. 성장이고 성숙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생명이 처음 출발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것은 없을 것이다. 아니 생명 자체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소와 질소뿐이었을 것이다. 우리 몸의 대부분이 물이라면, 우리 몸의 대부분은 수소 2개에 산소 1개를 가지고 있는 덩어리에 불과하다. H20가 고인 덩어리.

생명은 물에서 탄생했지만 물만으로 남지 않았다. 우리 생을 물로 봐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생명의 시간, 역사의 시간은 흘러 이제 우리는 자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은 생명이 아니다. 생명을 살리는 매개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자본에 매여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 있다. 종이나 플라스틱 조각에 새겨진 숫자에 사로잡힌 삶. 숫자에서 숫자로 이동되는 것을 생이라고 착각하는 삶.

자본은 노동력을 구매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삼는다. 자본에 의존한 노동력은 재생산이 필요한 만큼만 임금을 지불받는다. 아니 이제 재생산조차 점점 불가능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재생산이 되려면 삶이 지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노동을 하면 할수록 재생산은 더욱 어려워지는 사회가 되었다. 실업과 퇴직, 불안정한 고용, 기계에 의한 노동의 대체, 무기력한 삶. 그리하여 무엇인가 더해지는 삶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삶이 일상화 되었다. 연애, 결혼, 출산만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 기쁨, 여유, 행복을 포기하게 된다. 활력기계가 아니라 생존기계로 전락한다. 생존기계마저 고장난 상태이다.

인간의 노동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다. 인간의 노동이 과잉해서다. 그 과잉된 노동이 인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자본을 늘렸으며, 경쟁을 부추겼다.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 위한 배움이 아니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배움만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다. 더 공부할수록 더 힘들어지는 것은 자본이 파놓은 홈으로 삶을 갈아 넣었기 때문이다.

한때 신분제도의 불평등을 타파하고자, 평등사회를 구현하고자 사회구성원을 부추겼던 혁명운동 자본은 자유로운 평등사회를 구현하지 못하고, 부자유와 불평등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노동력의 재생산조차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본의 무능력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겪고 있다. 핏줄에 의해 지배가 결정되었던 신분사회는, 자본에 의해 지배가 결정되는 새로운 신분사회만을 낳았을 뿐이다. 핏줄 대신 자본이 신분을 결정짓는 것, 거기에 날 것으로서의 삶은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현사회가 이렇게 비참해진 것은 자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무능력 때문이다. 새로 생겨난 잉여가치를 사회적 가치로 순환시키는 대신, 새로운 신분을 만드는 탐욕스런 도구로 사용하였다. 과거 혁명운동을 대표했던 자본은 반혁명적 질서였음이 드러났다. 인류는 자본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시간과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는 폭군 자본의 지배는 이제 종식되어야 한다. 자본을 매개로 하여 연결되었던 모든 관계는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만약에 인류에게 상상과 창의가 필요하다면, 오늘날 가장 시급한 것이 자본이 없는 사회를 상상하고, 모색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과거 핏줄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 허상이었듯이, 자본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 역시 허상에 불과하다. 그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상상하자. 자본의 재생산에 종속되지 않는 자기생산을 실험하자. 자본과 연결되지 않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자. 삶을 포기하지 말고 자본을 포기하자. 자본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자.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