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혜 칼럼 <발랑까진>

지난 2월 열린 '힐난도, 자랑도, 수치도 아닌 콘돔전시회'의 모습. 여성 청소년의 성은 언제쯤 힐난도, 수치도 아니게 될까. <사진제공=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고양신문] 열여덟 살 때, 첫 번째 섹스를 했다. 소파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고, 파트너는 유통기한을 알 수 없는 콘돔을 내밀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나의 첫 번째 섹스는 폭력과 쾌락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나는 섹스를 한 여성 청소년에게 날아들 낙인과 비난을 알고 있었다. 파트너가 준 콘돔을 가방 깊숙한 곳에 찔러 넣으며, 나의 경험을 감췄다.

가방 깊숙이 숨겨둔 콘돔을 찾아낸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이게 뭐냐’고 물었다. 나는 “성교육 때 받은 콘돔”이라고 둘러댔고, 엄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날 밤 나는 혼자 많이 울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폭력에 가까운 섹스만이 아니었다. 여성 청소년이 성에 무지해야 한다는 편견은 어딜 가나 있었다. 동시에 여성 청소년이 성적 착취와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일도 허다했다. 사람들은 여성 청소년은 순결해야 한다고, 그러나 동시에 섹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두려움뿐이었다.

‘N번방’ 사건을 마주하며, 나는 그때의 두려움을 떠올린다. ‘N번방’ 사건은 성착취 영상물을 텔레그램 단체채팅방에 유포하는 방식으로 발생한 디지털 성폭력 사건이다. ‘N번방’ 사건의 피해 여성 중 상당수는 청소년이었다. ‘N번방’의 시작점은 트위터의 ‘섹계’, ‘일탈계’라고 불리는 계정이었다. ‘섹계’, ‘일탈계’는 익명이 보장된 SNS에서 자신의 노출 사진을 올리거나, 조건만남 등을 시도하는 계정이다. 가해자들은 이 계정을 해킹하여, 계정주의 인적 사항을 알아냈다. 그리곤 경찰을 사칭하여 협박하거나, “부모님에게 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N번방 사건’은 익명성에 기반해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여성 청소년들에게 유일한 ‘일탈’의 방식이 되는 현실과 맞닿아있다. 여성 청소년이 성에 무지해야 한다는 사회의 편견은 그들이 안전한 공간에서 성에 대해 발화할 수 없게 만들었다. “부모님에게 알린다”는 말은 어떻게 협박이 되었을까? 이는 그 자체로 부모가 청소년에게 제공하는 것이 ‘보호’가 아닌 ‘통제’와 ‘폭력’임을 반증한다. “부모에게 알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피해자가 겪은 두려움은 내가 엄마에게 콘돔을 들켰을 때의 두려움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N번방' 사건을 통해, 청소년이 제대로 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이 청소년 대상 성착취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나아가, 여성 청소년의 몸을 성적 착취와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에 분노한다. 26만 명이 성착취 영상물을 보기 위해 단체 채팅방에 접속했으나, 실제로 검거된 이는 100명도 되지 않는다. 시민들은 ‘N번방’ 사건의 제대로 된 해결을 위해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발의했다. 그러나 국회는 지난 5일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한 음란물 제작·유통·유포를 처벌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을 뿐, 텔레그램 등의 메신저를 기반으로 한 성착취에 대해서는 어떤 대안도 내놓지 않았다. 정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경험하고 있을 두려움에 무감각하다. ‘N번방’에 접속한 26만 명의 가해자들에, 그들의 디지털 성폭력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사회의 성폭력 문화에 분노한다.

두려움 뿐인 세상을 넘고 싶다. 두려워 할 사람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인 세상을 만들고 싶다. 나의 몸과 부끄러움 없이 조우하고 싶다. 다른 이들의 욕망으로 소비되는 일을 넘어, 나 자신의 고유한 욕망을 감각하고 싶다. ‘N번방 사건’ 이후, 우리가 만들어갈 사회가 ‘두려움’의 사회가 아닌, 여성 청소년이 성적 착취를 넘어, 성에 대한 자신의 언어를 가지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공동대표

국회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다시 대답하라. 성적 촬영물 유포를 빌미로 협박하는 행위를 처벌하라. 불법촬영물 소지를 처벌하라. 성착취 영상물을 공유할 경우, ‘집단 성폭력’ 등의 개념을 도입해 가중처벌하라. 디지털성폭력을 근절하고, 성폭력 문화로부터 자기 몸의 서사를 되찾기 위한 여성들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지난 2월 열린 '힐난도, 자랑도, 수치도 아닌 콘돔전시회'의 모습. <사진제공=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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