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이태원

이태원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고양신문] 한 다국적 기업이 개발 중인 숲속에서 트랙터가 나무를 쓰러뜨린다. 쓰러지는 나무 위로 박쥐들이 날아오른다. 숲이 망가지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박쥐떼는 인근 농가의 돼지 축사 위로 날아간다. 박쥐가 먹다 떨어뜨린 과일 찌꺼기를 돼지가 주워 먹는다. 얼마 후 돼지는 도축되고 고기가 식당으로 배달된다. 요리사가 고기를 맨손으로 만지며 요리하다 손을 씻지 않고 앞치마에 대충 닦고 밖으로 나가 방문자와 악수를 한다. 이후 그 사람은 기침, 발열, 발작 증세를 보이다 결국 사망한다. 영화 ‘전염병’의 끝 장면으로 영화의 소재이자 발단 부분이다.

약 10년 전에 만들어진 한 영화가 새삼 재조명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신종 전염병의 유행에 따른 인간의 공포와 대응 그리고 사회적 혼란을 묘사한 할리우드 영화로, 과학적 고증과 현실묘사가 뛰어남에도 상황전개가 정적이고 오락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적어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했다는 평가다. 무분별한 환경파괴, 혼돈상황에서 인간의 잔혹성과 무질서, 무분별한 정보의 확산과 이를 이용하려는 집단, 계층 간 정보격차, 백신 분배에 관한 딜레마 등, 현재 우리가 벌이고 있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상황과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게 놀랍다.

돌이켜보면, 인류 역사는 바이러스와 벌인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 전 1만 년 전부터 존재해 지금까지 수억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15세기엔 찬란했던 마야, 아즈텍, 잉카 문명의 멸망원인이 된 천연두, 14세기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을 사망케 한 흑사병, 1918년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를 강타해 무려 50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스페인 독감이 대표적인 예다. 이에 못지않게 인류를 괴롭힌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감기다. 매년 수만 명이 목숨을 잃지만 증상을 완화시킬 뿐 완벽한 백신 개발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한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전쟁은 멈추지 않고 있다. 2002년 중국 광둥성에서 박쥐와 사향고양이를 통해 전염돼 8200명이 감염되고 774명이 사망한 사스, 2009년 전 세계로 퍼져 국내에서도 76만 명이 감염되어 2070명이 사망한 신종 플루, 박쥐와 낙타로부터 전염돼 국내에서만 186명 감염에 38명이 사망한 메르스 바이러스가 주역이다. 아프리카 풍토병으로 2013년 서아프리카에서 2만8000명이 감염되어 치사율이 40%에 달했던 에볼라, 남미에서 모기를 통해 전염되어 100만 명 이상이 감염되어 수천 명의 소두증 신생아를 낳게 한 지카 바이러스도 빼놓을 수 없다.

올해도 유령과 같은 바이러스가 지구촌을 떠돌고 있다. 중국에 이어 국내로 들어온 코로나 바이러스는 중동과 유럽, 미국 등 전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4월초 현재, 전 세계 감염자는 100만 명에 달하고, 이로 인한 사망자도 4만 명을 넘어섰다는 보도다. 국내에서도 1만 명의 환자가 발생해 16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확산방지를 위한 각국의 국경통제로 세계경제는 물론, 지구촌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전염병 경보 최고단계인 팬데믹을 선언했지만, 이 사태가 어디까지 번질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는 게 영화의 공포를 넘어선다.

전염병이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건 치사율과 전염성이다. 1976년 콩고에서 처음 발견된 에볼라 바이러스는 아마존 다음으로 큰 밀림지역인 콩고분지를 넘지는 못했지만, 일주일 만에 90%라는 매우 높은 치사율을 기록했다. 현재 유행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금까지 치사율은 세계적으로 5%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별다른 증상이 없는 상태에서도 감염을 시킨다는 점에서 대전염병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만약 교통망이 촘촘해져 교류가 빈번해진 콩고분지에서 치사율이 높은 에볼라 바이러스가 다시 발생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변신의 귀재인 바이러스의 맹공에 인류는 적절히 대처할 수 있을까? 창궐하는 바이러스에 맞서 의술과 대응체계 그리고 시민의식 등 대증요법으로 싸우기에 너무 무기력함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바이러스에 맞서 싸우기보다 이들을 안심시켜 서식지로 돌려보낼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의료진의 노력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는 것도 과학기술의 덕택이지만, 바이러스가 지구 전체를 활보하게 만든 것도 과학기술 발전의 결과다. 현대사회는 무한 욕망과 성장의 과정에서 스스로 관리할 수 없는 위험을 동시에 생산하고 있다. 그 결과 서식지에 살던 바이러스가 인간을 숙주로 삼게 되었고,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는 계속 나타나 우리를 괴롭힐 게 불을 보듯 훤하다. 인공지능과 같은 과학기술 발전의 환상에 빠져있던 인류는 바이러스가 주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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