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도 윤리도 없는 자리싸움터, 한국 정당정치의 부끄러운 민낯

개혁 선거법 악용 꼼수 ‘위성정당’
소수정당의 진입 더 어려워졌다

유권자도 거대양당 구조로 귀속
정책과 공약보고 소신 투표하자

<이미지제공=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고양신문] 무려 48.1cm. 투표장에서 유권자가 받아들게 될 비례대표 투표용지의 실제 사이즈다. 나열된 정당 숫자만 35개에 달한다. 역대 어느 선거에서도 접하지 못한 최장 투표용지를 두고 논란이 뜨겁다. 중앙언론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위성정당이 만들어낸 기형적 투표용지’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자동 검표기가 무용지물이 됐다는 한탄 역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하지만 중앙언론의 이러한 반응은 두 가지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는, 본질을 한참 벗어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첫 번째 오류는 위성정당 때문에 투표용지가 길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미래통합당이 ‘자매정당’인 미래한국당을 만들고, 이에 맞서 더불어민주당이 ‘형제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만들어 투표용지에 밀어 넣은 것은 사실이지만, 대신 두 곳 모두 모체 정당이 비례대표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투표용지에서 빠졌다. 위성정당이 투표용지 길이를 늘렸다는 얘기는 팩트가 완전히 틀린 지적이다.

두 번째 오류는 투표용지 길이가 길어진 것 자체를 과연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색깔과 기반을 달리 하는 각양각색의 정당들이 투표라는 제도 아래서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가 지향해야 할 당연한 모습이다. 정당 숫자가 늘어난 것 자체를 시비해선 안 된다. 자동 검표기의 편의성을 확인하려고 4년을 기다린 게 아니라면 말이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신생정당들이 늘어나리라는 건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지난해 선거법 개정을 통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도가 부분적으로 도입됐기 때문이다. 소수정당의 국회 진입 문턱을 낮춰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발언권을 얻게 하자는 게 새로 만든 선거법의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길어진 투표용지가 아니라, 개정된 선거법의 취지를 보란 듯이 기만한 거대양당의 꼼수정치여야 한다. 제1야당과 여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위성정당을 만들어 투표용지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칸에 밀어 넣은 결과, 소수정당에게 돌아갈 한 줌의 의석마저 도로 기득권 정당의 몫이 돼 버렸다. 그 과정에서 두 정당은 의원 꿔주기, 공천 반란과 진압, 소수정당 들러리 세우기 등의 파렴치한 정치 테크닉을 경쟁적으로 보여줬다.

중앙언론이 너나없이 쏟아낸 ‘긴 투표용지’에 대한 비난은 정치권 전체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조장할 여지가 높다. 정치가 불신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할 때 득을 보는 이들은 말할 것 없이 기득권 거대양당이다. 변화를 꿈꾸었던 이들은 투표를 포기하고, 기성 정당의 습관적 지지자들만 투표장으로 향한다면, 정치 지평의 확장은 이번 선거에서도 물 건너가 버린다.

거대양당이 나란히 위성정당을 만드는 행태를 목도하며 시민들은 “겨우 이 꼴을 보자고 그 난리를 치며 선거법 개정을 했단 말인가” 한탄한다. 한 지역원로는 “불량식품으로 차려진 밥상을 걷어차 버리고 싶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권자에겐 권리를 포기할 권리가 없다. 코로나19가 가져온 여파가 보여주듯,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이 한가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구태가 아닌 새로움을, 어제가 아닌 내일을 선택하려면 내 한 표를 어디에 던져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 후 투표장으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정치 지형을 열 씨앗이 긴 목록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고양신문 1면에 투표용지를 미리 보여드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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