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혜의 <발랑까진>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공동대표

[고양신문] 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칼럼을 쓰기가 어렵다. 코로나19로 인해, 도서관도, 코인노래방도, 목욕탕도 가지 못하게 되어서일까? 나는 몇 주간 유례없이 ‘놀고 싶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놀이터에서는 ‘깍두기’를 자처했다. 스무살이 된 이후에도, 떠들썩한 술자리 분위기는 낯설고 불편할 때가 많았다. 남들이 보기엔 놀 줄 모르는 ‘샌님’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모범생으로 살아온 나는 뜬금없이 찾아온 ‘놀고 싶다’는 욕망을 잘 실현하기가 어렵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의 31조에는 “모든 어린이는 충분히 쉬고 놀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노는 일’은 나에게 죄책감이 드는 일이었다. 집에서 인터넷 게임을 하다가도 부모님이 오시면 컴퓨터를 후다닥 끄고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펴곤 했다. 칭찬 받는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딴 짓하지 않아야 했다.

중학교 입학 이후에는 일상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냈다. 방과후수업까지 마치고 나면 해가 질 무렵에나 하교를 했다. 야간자율학습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주변이 깜깜해진 밤에나 교문을 나섰다.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기진맥진해져, ‘놀이’랄 것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교실에서 창문 밖을 바라보며, 평일 한낮의 오후를 만끽할 수 없는 것이 내심 억울했다.

더불어 ‘놀 만한 공간’도 마땅하지 않았다. 학교나 가정 바깥에서 청소년이 놀이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은 국한되어 있었다.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던 놀이터나 공터는 점점 없어졌다. 놀기 위해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은 기껏해야 노래방, PC방, 게임방이고, 그마저도 오후 10시가 지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욱이 경제권이 없는 청소년들은 놀이의 공간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불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시간과 공간의 부재 속에서, 청소년의 놀이문화는 온라인 공간으로 축소되어 갔다.

해가 잘 들던 오후의 풍경.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야 평일 한낮의 오후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사진=양지혜>

입시경쟁사회가 빼앗은 것은 아동청소년의 놀 시간만이 아니다. 평등과 다양성이 아닌, 줄세우기 경쟁에 기반한 학교는 청소년의 놀이문화를 존중이 아닌 획일화된 차별과 혐오의 방식으로 재구성했다. 여성에 대한 외모품평, 비하 등의 남성문화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참하는지가 남학생 사이의 서열을 결정한다. 꾸밈노동을 거부하거나 성역할에 순응하지 않는 여성 청소년은 학교 내에서 괴롭힘이나 배제의 대상이 된다. 평등하고 즐거운, 모두가 폭력을 경험하지 않는 방식의 놀이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페미니스트인 나는 별 생각없이 유튜브를 보다가도 성, 학력, 인종, 나이 등을 차별하는 멘트에 멈칫한다. 요즘 유행이라는 가수 비의 노래 ‘깡’도 나에게는 별로 즐겁지 않다. 이 노래에 나오는 ‘오빠’라 불러달라며 자신을 과시하는 남성상은 유해하다. 그의 다른 노래인 ‘어디 가요 오빠’, ‘차에 타봐’ 등은 여성과의 관계에 시대착오적인 인식으로 범벅되어 있다. 여전히 미디어에서는 여성의 신체를 조롱하거나 비하하는 등 여성혐오적인 언행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잘 노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희박한지를 깨닫는 요즘이다. 흔히 ‘노는 일’은 한심하고 무가치한 일로 여겨진다. 일을 하지 않는 이들은 집에서 놀면서 밥이나 축내는 존재로 질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잘 노는 것은 나 자신과 주변을 돌보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누군가를 돌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아동청소년에게 놀 권리를 보장하고, 즐겁고 평등한 놀이를 함께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잘 노는 것, 나 자신과 주변을 돌보는 것이 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겨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일하는 시간만큼이나 잘 노는 시간이, 일할 권리만큼이나 놀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차별과 혐오가 ‘놀이’로 소비되던 기존의 관행을 넘어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방식의 놀이문화를 함께 찾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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