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 심리치유센터 대표

[고양신문] 평소 고양신문을 읽으면서 칼럼의 필진이 대부분 중년 남성이어서 나 같은 중년 여성의 관심사나 정서에는 거리가 있어 아쉬웠다. 기회가 닿아서 독자로서 의견을 내봤는데 그럼 본인이 써 보라, 하시지 않는가. 칼럼을 권했다가 칼럼을 권유받았다.

여성의 언어와 남성의 언어는 다르다. 기혼의 언어와 미혼의 언어가 다르듯이 말이다. 한집에 살아도 아내의 지문이 묻는 물건이 따로 있고 남편의 지문이 묻는 물건이 따로 있다. 20년 넘게 세 아이를 양육하고 살면서, 또한 상담사로서 7년 여간 중년 여성들과 ‘심리 글쓰기’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쌓인 데이터도 그렇다.

어떤 글을 원했던가. 마음에 들어와 어루만져주는 위로의 글, 전두엽을 거쳐 편도체까지 도달하여 심금을 울리는 칼럼을 원했다. 옳은 말, 근사한 지식, 성현의 진리의 말씀 그런 것도 좋지만, 하루 종일 ‘삼 시 세 끼’ 밥해 먹는 예능프로도 좋고 눈물 쏙 빼게 하는 드라마에 빠지는 것도 정서에 필요하지 않던가. 이번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엄습할 때 답답하고 우울한 우리를 달래주는 것이 얼마나 절실했는가.

내게 찾아오는 분들은 대부분이 4050 중년 여성들이다. 공통 고민들은 짐작하시다시피 자녀 문제이다. 잘 키울 수 있을 줄 알았고 잘 키웠다고 자부했건만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자존감까지 바닥을 치고 온 그분들, 그 심정을 왜 모르겠는가. 나 또한 완벽한 엄마가 될 거라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가 끝 모를 추락을 경험했었다. 첫째를 낳은 지 3년 만에 장애아 판정을 받고 좌절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었다.

여자에게 엄마 정체성은, 특히나 한국 여자에게 엄마 정체성은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다른 인정받을 만한 게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래서 자녀를 일류대에 보내려고 전력을 다하고 자녀의 일류대 합격통지서를 받은 이가 면류관을 쓴 것처럼 느껴지는 게 아닐까.

꿈에 부풀어 직진하는 엄마의 손을 자녀가 잘 따라와 주면 고맙겠지만, 아니 그것이야말로 당연하고 옳은 거라며 여기겠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찌 막으리요. 아이들은 박차고 나간다. 힘이 생기기만 하면 눈을 부라리며 자유를 선언한다. 심지어 엄마라는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생전 정 없이 살던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자책과 수치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법. 가장 소중한 존재와의 갈등이기에 엄마는 버림받음, 배신감, 수치심이 분노와 엉긴다. 결국 에너지가 소진되는 상황이 되어 주저앉고 포기하기에 다다른다. 패배자가 따로 없다. 가족이 서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는 관계에 금이 갔을 때의 절망감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비로소 그 때에 자신을 향한 창문을 연다.

“제 안에 독이 있어요! 그 독을 버리려고 왔어요.”

어느 날 찾아오신 굳은 표정을 한 중년 여성의 자기소개였다. 이 프로그램에 오시게 된 목적이 무엇이냐 묻자 이렇게 답하시는 것이었다. 얼마나 자녀 문제로 고생하셨기에 본인의 문제라며 자책하시는 건가. 눈대중으로도 짐작이 확연히 되었다.

“네, 그런 목적이 있으시군요. 그럼 이 시간에 그 독을 한번 찾아보지요. 그런데요, 그 독이 보물인 경우도 있어요. 우리 함께 찾아봐요.”

아마도 생각지 못한 피드백이었는지 그분은 한동안 멈춰 계셨다.

박완서 수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는 마라토너 얘기가 나온다. 1등이 환호와 영광을 다 가져가 버리고 한참이 지나 이윽고 들어오는 꼴찌가 있더란다. 행여 주저앉아 버릴까 봐 자신도 모르게 열렬하고도 우렁찬 환영을 했단다. ‘이렇게 정직한 고통, 정직한 고독이 어디 있느냐’ 며 찬양하는 묘사가 나오는데 나는 엄마라는 직함도 정직하게 고통스럽고 정직하게 고독하다 느꼈다.

자신 스스로를 독을 가진 엄마라고 소개했던 분은 3개월 만에 독이 아닌 빛나는 진주를 찾으셨다. 그리고 춤을 추고 싶다고 하셨다. 자유롭게 춤을 추며 진정한 자신을 만나고 싶다며 춤 테라피를 원하셨다. 뭔가 가득찬 표정, 당당한 청춘의 모습을 찾은 마지막 모습은 3개월 전 그 사람이 아니었다.

아픈 엄마들에게 드리고 싶은 헌사가 있다.

“당신은 완벽한 엄마는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엄마입니다. 좋은 엄마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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