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조달 지역우선·공공은행 설립 통해 진정한 자족도시로

영국 프레스턴의 '지역순환경제' 사례는 지역 주도의 경제 활성화를 촉진하고 소유권 패턴을 민주적 대안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 지방 정부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어떤 방식으로 자본이 지역 내에서 순환할 수 있는지 시각화한 ‘프레스턴 모델’ 이미지 자료. (출처: The Next System Project) 

대기업 모시기, 실상은 지역 부 외부유출 초래 
시민들이 지역경제 주인되는 ‘민주적 통제’ 필요
미국 클리블랜드, 영국 프레스턴 성공사례
지역기업, 협동조합 육성 통한 ‘분수효과’ 기대


[고양신문] 정치의 계절이다. 여느 선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지방선거의 공통된 경제공약은 ‘기업 유치’다. 여야후보 가릴 것 없이 기업주의 담론을 이야기한다. 도시 공간을 기업과 같이 경영해야 한다는 것. 도시를 마케팅하고 투기자본을 유치해 역동성을 도모한다는 천편일률적 방식이 어느새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방법 외에는 다른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은 염두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싶다.
토목공사 중심의 개발사업과 대기업 유치와 같은, 성장 동력을 지역 외부에서 ‘모셔오는’ 방식의 경제 정책만이 해법일까. 이와 대비되는, 지역 안에서 돈이 돌고 지역의 소득이 지역에서 소비되고 지역기업이 지역 내 다른 기업으로 재투자되는 이른바 ‘지역순환경제’라고 불리는 대안적 경제 모델이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단순히 아이디어 수준을 넘어 이미 국내외적으로 실증적 경험적 사례들이 나타나는 추세다. 이번 주 지방선거 이슈&제안은 지역경제 활성화의 대안으로서 지역순환경제를 다뤄본다. 


대기업 유치 통한 '낙수효과'는 허상
내재적·생성적 방식의 경제 필요

“지역경제가 피폐해져 있습니다. 서울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지역의 경제적 동력이 서울로 빨려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수도권 도시는 오히려 더 심각해요. 이를테면 제가 있는 인천 같은 경우 시민들의 소득 중 52.8%가 서울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지역순환경제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양준호 인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주류경제학에 비판적 견해를 지닌 학자다. 그는 지자체들이 흔히 기대하는 대기업 유치를 통한 경제 활성화, 이른바 ‘낙수효과’에 대해 허상이라고 말한다. 유치에 성공하더라도 대부분 본사가 아닌 자회사 형태로 이전해오는 데다가 유입된 자금 또한 연쇄적 파급효과를 내는 투자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천 송도에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있어요. 유치 당시 송영길 전 시장이 삼성계열사가 왔다며 온갖 기대와 자랑을 늘어놨죠. 정작 지역경제에 도움 된 건 없습니다. 원재료나 중간재 일부라도 지역 기업으로부터 조달하는 식의 지역 재투자를 하지 않아요. 게다가 MOU내용을 살펴보면 이곳은 서류상 본사가 아닌 자회사에요. 상법상 자회사는 지적재산권 사용료 명목으로 모회사에 수익을 그대로 헌납하게 되어있습니다. 즉 인천에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받고 인천에서 돈을 벌어도 정작 그 돈은 모회사가 있는 다른 곳에 가버리는 거죠.”

‘대기업 유치 만능론’ 대신 그가 이야기하는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은 이른바 지역순환경제다. 이는 최근 기후위기 대응과 연관해 생태주의 진영에서 논의되고 있는 ‘순환경제’와는 약간 결을 달리한다. 양 교수에 따르면 지역순환경제는 지역 주민들의 소득이 지역 안에서 소비되고 지역 시중은행에 축적된 자금이 지역경제를 위해 투·융자되는, 나아가 지역기업이 필요한 원재료나 중간재 등을 지역 내 기업들로부터 조달해 오는 형태의 경제 모델을 말한다.


영국 프레스턴 ‘지역사회 부 만들기’
지역경제 살리고 선순환 구조 마련

양준호 교수가 대표적인 예로 제시한 곳은 미국 클리블랜드와 영국 프레스턴이다. 두 지역 모두 ‘지역사회 부 만들기(Community Wealth Building)’라는 새로운 지역경제 모델로 주목받아왔다. 그중 프레스턴 모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시청, 공공기관, 병원 등 앵커기관(지역중추기관)의 지역우선구매. 지역기반기업 및 노동자협동조합 등을 통한 지역조달시스템 구축. 이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일자리에 최저임금보다 20% 높은 생활임금 적용. 마지막으로 공공투자를 위한 광역커뮤니티은행 설립 등이다. 2010년부터 시작된 이러한 노력으로 프레스턴은 2018년 영국 내 도시성장지표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중 프레스턴 지역순환경제를 이끌었던 핵심은 앵커기관들의 지역조달시스템이었다. 2007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1조원 규모의 도심재개발사업을 포기한 프레스턴 시정부는 새로운 지역경제활성화방안으로 클리블랜드 사례를 벤치마킹했다. 지역 앵커기관의 공공조달 같은 지출을 기존 다국적기업이나 외부 대기업이 아닌 지역기반 기업, 지역의 노동자들이 소유하는 노동자협동조합을 통해 이뤄지도록 해 지역에서 만들어진 부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경제와 일자리가 선순환되는 구조를 마련한 것이다. 

“학교 급식을 예로 들면 과거에는 통합발주를 하다 보니 우리나라로 치면 CJ와 같은 런던의 독점 자본이 다 가지고 갔다는 거죠. 그런데 프레스턴 시의회에서 조례를 제정한 뒤에는 조달방식을 분야별로 세분화시켜 입찰하면서 영세한 지역 업체들도 다 참여할 수 있게 되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만약 발주하는 분야 중 이를 조달할 지역 기업이 없다면 노동자협동조합을 육성해 공공조달을 맡기는 전략도 취하고 있어요.”

핵심은 두 가지다. 앵커기관들의 경제 동력이 지역 안에서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공공조달 입찰제도를 이른바 지역순환경제적 방식으로 재디자인하는 것. 이러한 방식을 통해 양 교수는 외부자본 유치를 통한 ‘낙수효과’가 아닌 지역에서 자생하는 ‘분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고양시를 예로 들면 고양에 기반을 가지고 활동하고 성장해온 사업체들이 잘될 수 있도록 해야 지역 안에서 사람을 고용하고 그 안에서 여타 사업체들과 산업연관을 강화해나갈 수 있죠. 이게 낙수효과와 대비되는 분수효과예요. 이걸 키우려면 지역 기업을 우대하는 정책, 그 기업이 또 다른 지역 기업들과 산업 연관을 강화시킬 수 있는 정책, 마지막으로 이 기업들이 지역 내 인재들을 고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 이런 것들이 바로 분수효과를 담보하기 위한 지역주의적 경제정책인 거죠.”

이외에도 다양한 영역에서 지역순환경제 방식을 적용해 볼 수도 있다. 가령 공기업 등에서 시행하는 ESG경영 방안 중 하나로 지역화폐 캐시백 일부를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다. 양준호 교수는 “그동안 대기업, 공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 기껏해야 기부나 캠페인, 장학금 정도가 전부였는데 앞으로는 지역경제에 좀 더 실효성 있는, 지역에 착근하고 구체화된 기여방식이 필요하다”며 “최근 인천국제공항공사가 ESG경영 방안으로 지역화폐 캐시백 지원을 추진하고 있고 건강보험공단 경기인천본부에서도 이를 검토 중인 상태”라고 전했다. 

지역순환경제전국네트워크 4대 공약 제안
오해하지는 말자. 지역순환경제가 활성화한 도시라고 해서 지역 내에서 100%로 자급자족이 이뤄지기는 힘들다. 가령 지역 내 순환되는 부가 20%에 불과하다면 이 비중을 높여나가는 것이 중요하고 여기에 지역순환경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생산의 패러다임의 변화도 기대할 수 있다. 

지역순환경제는 단순히 경제적 효과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역 경제주체들 간의 조직화를 통해 호혜적 관계를 맺게 되면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고 지역사회가 ‘탄탄’해진다. 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장하게 한다. 시민들은 자생적 경제를 경험하며 문자 그대로의 자치를 배우고 실행하게 된다. 진정한 의미의 지역공동체가 구축되는 것이다. 

지역순환경제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양준호 인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그는 대기업 유치를 통한 '낙수효과'는 허상에 불과하다며 내발적, 생성적 경제를 통한 '분수효과'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역순환경제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양준호 인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그는 대기업 유치를 통한 '낙수효과'는 허상에 불과하다며 내발적, 생성적 경제를 통한 '분수효과'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지역순환경제를 고민하는 전국의 연구자, 활동가 등이 모여 작년 10월 지역순환경제전국네트워크(이하 지순넷)를 결성했다. 지역경제활성화를 위해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정당 후보들에게 4대 공약도 제안 중이다. 지역화폐 활성화를 비롯해 지역재투자 활성화를 위한 법제도적 기반 마련, 지역 자산의 공유재(커먼즈)화, 지역공공은행 설립 등이다.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지역화폐 활성화 공약은 정부 지원예산 삭감을 대비해 지역화폐가 지역의 지속가능한 소비수단으로 자리잡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로 제안됐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공과금, 수수료 등 다양한 공공서비스 영역에 대한 지역화폐 확대 ▲지역화폐 플랫폼과 연계된 다양한 부가서비스 도입 ▲지역화폐 발행지원을 위한 시민펀드 및 공공기금 조성 ▲지역화폐와 마을공동체사업 연계 확대 등이다.   

지역재투자 활성화 법제도 마련 공약의 경우 부산시 지역재투자 조례사례와 같이 지역의 공공기관, 금융기관, 기업의 지역재투자 활성화를 지원·유도하는 조례를 제정할 것을 제안한다. 아울러 ▲금융기관의 지역사회에 대한 재투자 의무화 ▲지역재투자 기금 설치 및 운용 ▲지역재투자 활성화를 위한 인센티브 제공 등을 담고 있다. 앞서 논의한 영국 프레스턴 사례와 같이 지역 앵커기관의 공공조달이 지역기반기업 또는 지역 노동자 소유의 사회적경제조직을 통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중앙정부 의존 없이 공공투자 가능 
미국 노스다코타 주 공공은행 사례  

가장 눈에 띄는 공약은 지역공공은행 설립이다. 영세상인, 사회적경제조직 등 지역 경제주체들의 금융접근성을 높이고 금융 약자들에게 저금리 대출을 지원하는 내용의 ‘지역공공은행’은 이번 선거를 앞두고 일부 지자체장 후보들이 공약으로 내걸고 있는 의제다. 하지만 양준호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지순넷에서 제안하는 공공은행은 지자체가 100%로 출자하는 그리고 지자체가 소유하는 금고입니다. 시 예산과 세수까지 운영하는 시 금고를 말하는 거예요. 이 공공은행은 시 예산을 독점적으로 확보하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지역에 대한 획기적인 공공투자가 가능해집니다. 중앙정부 지원에 얽매이지 않는 고양시만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공공정책이 가능해진다는 거죠.”

청년 등 고양시 주거약자들을 위한 공공주택이나 공공의료를 책임지는 시립병원, 교통소외지역을 연결하는 대중공공버스 운영 등.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하지만 부족한 지방재정 탓에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정책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규모의 투자재원을 조달할 수 있는 공공은행이 있다면? 반드시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미 사례는 충분하다. 100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미국 중북부 노스다코타주의 공공은행이 대표적이다. 1919년 설립된 이 은행은 공공사업에 대한 재원공급뿐만 아니라 지역 내 취약계층에 대한 공공적 지원으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지역주민의 복지향상과 공익에 기여하고 있다. 양 교수는 “이 공공은행 덕분에 노스다코타주는 민주당과 공화당 정부 가릴 것 없이 진보적이고 공공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1919년 설립된 미국 최초의 공공은행 ‘노스다코타은행’
1919년 설립된 미국 최초의 공공은행 ‘노스다코타은행’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노스타코타주 공공은행 또한 뉴욕 월스트리트 은행의 공격과 정치적 외압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다. 그러함에도 주 정부의 노력과 소농과 소상공인 등 주민들의 열성적인 지지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동력이 됐다. 노스다코타주의 사례가 성공을 거두면서 최근 캘리포니아 등 미국의 여러 주들을 중심으로 더 공정하고 정의롭고 민주적인 금융을 위한 공공은행(Public bank) 설립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뉴욕주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20대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같은 젊은 정치인들의 지지도 한몫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공공은행 설립이 가능할까. 이러한 공공재투자에 기반한 지역순환경제 모델을 구축할 수 있을까. 추진동력은 결국 정치에 달렸다. 지방선거가 한 달여 남은 지금, 중앙이슈에만 에너지를 쏟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들을 바라보자.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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