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문화평론가
이인숙 문화평론가

[고양신문]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그을린 사랑>은 캐나다 이민자인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이 사망한 엄마 나왈의 유언에 따라 형과 아버지를 찾는 여정을 그린다. 엄마의 흔적을 좇아 레바논으로 온 잔느는 엄마의 과거를 한 꺼풀씩 벗겨낸다. 마지막의 충격적 반전과 참혹한 진실은 눈을 가리고 싶게 만든다. 

  기독교계였던 나왈은 팔레스타인 난민과 사랑에 빠졌다. 두 오빠는 남자를 사살하고 나왈까지 죽이려 했지만 할머니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이른바 명예살인이다. 죽은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나왈은 할머니의 도움으로 출산하지만, 아이를 키울 수 없어 발뒤꿈치에 점 세 개의 문신을 하고 고아원에 보낸다. 나중에 아이를 찾기 위한 표식이다. 

  내전이 발발하고 아이를 찾기 위해 나선 나왈이 목격한 전쟁의 참상, 민간인 버스를 공격한 기독교민병대의 잔인한 학살에 분노한 나왈은 이슬람 세력에 들어가 기독교 지도자를 처단하고 투옥된다. 여기서 만난 고문 기술자 아부 타렉에게 온갖 몹쓸 짓을 당한 나왈은 쌍둥이를 출산한다. 그 쌍둥이가 바로 잔느와 시몬이다. 이어지는 충격적인 반전. 

  종교 혹은 신념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념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러나 그것이 반지성과 결합하여 맹목성을 띨 때 지극히 위험한 것이 된다. 자신의 신념을 절대시할 때, 그래서 서로 다른 신념이 부딪칠 때 분열과 증오가 태어난다. 

  한국사회의 분열과 반목을 레바논의 비극과 비교하는 것은 과한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 사회의 분열은 이미 위험수위에 달했다. 정쟁의 수단으로 끊임없이 이를 부추기는 정치인과, 진실을 찾기보다 정파적 입장에서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침 뱉기를 서슴지 않는 거대 언론들이 분열과 증오를 확대 재생산한다. 그리고 서로를 반지성주의라고 비난한다. 

  반지성주의는 지적인 고찰이나 논리적인 사고보다 즉흥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를 선호한다. 대중은 길고 복잡한 논리적인 설명보다 짧고 단순한 감성적 구호에 쏠린다. 포퓰리즘이 반지성주의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팬데믹 초기에 중국인을 막지 않아 코로나가 퍼졌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코로나의 국내유입은 중국인이 아니라 중국에서 귀국한 한국인을 통해 퍼졌다는 사실 같은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반중정서를 자극하는 이러한 주장들이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며 반지성주의적 행태이다. 

  최근에는 전임 대통령 사저 앞에서 욕설과 증오의 말들을 마이크로 쏟아내는 행태가 몇 달째 이어지고 있다. 소음에 시달려 병원에 다니는 주민들도 있다. 시위자들은 어떤 주장도 없이 다만 욕설과 저주의 말들을 퍼부을 뿐이라고 한다. 이러한 행태는 반지성주의라는 말조차 아까울 정도이다. 시위자들의 행동은 신념 때문이 아니라 돈벌이 때문이라고 한다. 욕설 방송을 보면서 돈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인데, 그들은 왜 돈을 보내줄까. 욕설 방송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돈은 보내준다는 것은 건강한 정신상태가 아니다. 

  어떤 정부든 공이 있으면 과도 있다. 공과 과를 따져서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둥글면 둥글다고 모나면 모났다고 끊임없이 비난을 위한 비난을 퍼부어대는 쪽의 말만 듣다보면 상대방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적이 되고 만다. 지금 일부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 국민들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을린 사랑>에서 남매는 엄마 나왈이 형과 아버지를 찾아 전달하라는 편지를 당사자에게 전달한다. 이들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해서 이를 마주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을 옭아매던 증오와 비극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분열과 반목, 증오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서는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반지성주의적 포퓰리즘의 구호를 남발하는 정치인과 언론에 속지 않기 위해서도 개개인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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