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원석 칼럼 [내일은 방학]

송원석 문산고 교사
송원석 문산고 교사

[고양신문] 꿈으로 가득한 만 17세, 고등학교 2학년과 함께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촛불 하나 켜놓고 속마음을 털어놓게 하는 진실의 시간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
고등학교 사회 선택과목 중에 ‘정치와 법’이라는 과목이 있는데, 1학기는 정치를, 2학기는 법을 다룬다. 법 단원 중 민법에서 유언장의 효력 및 법정 상속 개념이 나온다. 미성년자는 민법상 단독으로 행위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법적 보호자, 즉 친권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유언장은 법적 보호자의 동의 없이 만 17세부터 법적 효력을 갖는다.

우리 교과서는 청소년들이 단독으로 할 수 없는 일들만 잔뜩 나열해 놓고 그들에게 토론을 시킨다.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안을 찾아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면에서 유언장 작성은 실제적이고 효능감을 느끼게 하는 생활형 수업 활동이다. 법 수업을 할 때 근로계약서 작성하기, 유언장 작성하기를 매년 실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주 예전에는 미래를 상상하며 혼인신고서 작성하기. 출생 신고서 작성하기를 한 적도 있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으로 그만두었다. (같은 반에 좋아하는 학생이 배우자로 둔갑 등등)

유언장을 작성하기 전 안전한 활동임을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수업의 학습 목표(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장을 작성할 수 있다)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잠재적 수업 목표(나는 언제 가장 진실한가?)를 공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전함에서 진실은 시작된다. 

1. 유언장 내용에 꼭 들어가야 하는 기본적인 인적 사항은 개인 정보 차원에서 생략 가능
2. 유언장은 가장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선생님도 볼 수 없음
3. 발표 시간은 있긴 하지만, 희망하는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패쓰~~

유언장 양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와 형제자매, 친구, 그리고 지인들에게 남길 말을 적게 한다. 장례 방식에 대한 언급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유산 상속에 대해 적는다. 유언장의 작성 시점이 만 17세인 현재이기 때문에 상속할 재산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소중한 물건 등을 가능하면 적어보라고 이야기한다.
안전한 분위기 속에서, 권리 능력이 있는 만 17세 친구들이 유언장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올해도 역시 생각보다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짧은 17년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있다. 분신사바 이래로 이렇게 엄숙한 펜 굴림을 본 적이 없다. 수업 종료 5분쯤, 유언장 작성은 끝나고 송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유언장은 여러분의 인생이 담겨 있어 선생님이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폐기해주세요. 만약에 폐기하지 않고 집안 어딘가 굴러다니다가 우연히 부모님이 발견하게 되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

혹시 유언장의 일부라도 공개할 수 있는 학생이 있는지 물어보면 반에 1명은 꼭 나온다. 그리고 몇 문장을 읽기도 전에 작은 흐느낌이 시작된다. 어렵게 발표해준 17세 시민에게 감사들 표하며 수업은 끝난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는 박수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운다. 내 삶과 연계된 교육은 아름답다. 거짓이 아닌 진실이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17세 시민들에게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 책임도 생긴다. 삶의 주인이 아닌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민주 시민이 될 수 없다. 죽음 앞에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진실했던 그들을 통해 또 다른 배움이 시작된다. 과거를 왜곡하고 미래를 도구화하는 말 잔치의 시대, 죽을 각오로 진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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