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태울 사람 찾습니다-박태성 효자묘와 호랑이 석상

효자는 섬기지만, 불효자에게는 군림하는 호랑이

2005-09-13     권혁상
효자동 제청말 북한산 기슭에서 호랑이가 울부짖는다.어흥! 어흥! 계곡을 타고 내려와 도심으로 울러퍼진다.사람들 귀에는 자동차 소음으로 들린다.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잡음으로 들린다. 저 많은 사람들 중에 등에 업고 달리고 싶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어흥! 어흥! 호랑이는 시름에 허덕인다. 어느 토요일 오후, 술자리 뿌리치고 치매 걸린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황도 사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는 어느 남자를살아생전에 물을 그렀게 좋아하신 어머니 산소에생수 한 병 사 가지고 찾아가 뿌려주고 있는 어느 여자를겨우 찾아내고서는 어찌할 줄 몰라 등에 태워 달린다.쏜살같이 참 세상으로 달린다. 북한산성 입구를 지나 송추 쪽으로 조금 올라가자 푯말이 나타났다. 오래 전에 산행을 하다가 지나쳤던 길이었다. 산길에 꽂혀있는 푯말을 보고 ‘박태성이가 누군가?’하며 지나쳤던 기억이 되살아났다.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우산을 쓰고 푯말 따라 올라가다보니 묘가 나타났다. ‘3위가 나란히 있다고 했는데….’ 묘비를 언뜻 보니 박세걸의 묘였다. 박태성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참배한 그의 아버지 묘였다. 적막이 감도는 어두침침한 산길을 묘를 찾아 올라가고 있었는데, 오른쪽 앞 숲속이 갑자기 환한 빛이 감돌았다. 그 빛 속으로 묘 3위와 호랑이 석상이 드러났다.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묘지를 비추고 있었던 거였다. 신비스러웠다.이조 말이었다. 한양 효자동에 박태성이라는 효성이 지극하기로 이름이 높던 사람이 살았다. 박태성의 부친은 아들의 공경으로 행복하게 사시다 수명이 다하였다. 박태성은 고양군 신도면 제청말, 북한산 기슭의 양지 바른 곳에 부친의 묘소를 쓰고, 3년 동안 날마다 참배하였다. 서울 문안에서 무학재, 녹번고개, 박석고개 등 여러 고개를 넘어야 하는 그 길을, 숲이 울창한 험한 길이었지만, 박태성은 왕복 오십리 길을 하루도 빠진 일이 없었다. 더구나 산 속엔 산적이 우글거리고, 호랑이도 나타나는 곳이었지만, 그러한 것들은 박태성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지 못했다. 공경해 모시던 아버지! 이젠 더 이상 공경해 모시지도 못해 하늘이 무너진 듯하였다. 이렇게 하루 한 번이나마 찾아뵙고 인사 올릴 수 있는 것이 커다란 위안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두려운 것도 그를 조금치도 동요시키지 못했다.그러던 어느 겨울, 눈보라가 치고 폭풍이 휘몰아치는 추운 날, 부인이 하루만 쉬라고 만류했으나, "내 몸이 본시 부모님의 은공을 입어 세상에 태어났으니, 어찌 몸을 아껴 자식된 도리를 궐하겠오."하며 박태성은 한사코 길을 떠났다.눈보라가 더욱 세찼다. 그는 눈에 파묻혀 죽는 한이 있어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눈 속을 헤치고 가느라 기진맥진해서 결국, 무악재 깊은 숲 길길이 쌓인 눈 구덩이에 쓰러지고 말았다. 얼어죽거나 짐승의 밥이 되는 판이었다. 때 마침 먹을 것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집채만한 호랑이가 사람 냄새를 맡고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호랑이는 앞발을 들어 박효자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아닌가. 정신이 든 박효자는 호랑이가 시키는 대로 그 등에 올라탔다. 호랑이는 단숨에 박효자를 그 아버님 무덤 앞에 업어다 주었다. 돌아가는 길에도 무학재까지 업어다 데려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호랑이는 박효자가 올 시간을 기다려 매일 같이 업어다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박효자는 호랑이의 호의로 삼년 동안 효성을 다할 수 있었고, 마침내 거상을 벗게 되었다. 그런지 몇 달 후였다. 그 동안 상을 당하여 악의악식(惡衣惡食)으로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효행을 다하다 몸이 쇠약해진 탓인지 박효자는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본(本)은 밀양(密陽)이요, 자는 경숙, 벼슬이 통덕장(정5품)에 이르렀다. 묘소는 박태성의 유언을 따라, 북한산 기슭 선영(先塋)에 묻혔다.그런데 졸곡이 지난 어느 날, 박태성 묘 옆에 커다란 늙은 호랑이가 나타나 어흥 어흥 외치고는 곧 죽고 말았다. 마을사람들과 후손들은 왕산 호랑이라 생각하여 무덤 옆에 호랑이의 시체를 묻었다. 이 이야기가 고종 귀에까지 들어가 1893년에 박태성의 효자비(정려비)를 세우게 되었다.이때부터 이 마을의 이름은 효자리(孝子里)가 되었다.호랑이는 성이 나면 남의 집 삼대독자도 물어 가고 첫날밤을 지내는 신방을 부셔버리기도 하지만 효자, 열녀 같은 의로운 사람은 돕고 위해주기도 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