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답사

2005-11-22     권혁상
‘辛卯 六月十三日 始役 九月初十日 完畢 水口牌將 通德郞 徐尙遠 書記 □□ 片首 金正交 金□□...’ 수구문 공사 내역을 새겨놓은 ‘북한산 수구문 암각자’이다. 李致復 朴師漢 李弘復 朴師淳 등등. 서암사지 아래 눈썹바위에 새겨진 이름들이다. 책을 뒤적이듯이 고양시사편찬위원회 권효숙 연구원을 따라 북한산을 뒤적이니 요소요소에서 문자들이 나타났다. 북한산은 그 암각자들로 격조 높게 디자인 되어 있었다. 그 디자인에는 같은 공간 속에서 시간을 달리해 존재하였던 사람들을 가깝게 느낄 수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었다. 북한산은 옛사람들의 마음과 네트워크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산이었다.북한산을 1,600여 회나 오른 신용명(‘내 속에 산을 얻었으니’의 저자) 씨와 시인 이성희(서정시마을 운영자) 씨, 박영선 기자 등은 북한산 암각문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체계적으로 하고 있는 권효숙 연구원의 안내와 설명을 통해 옛사람들과 접속을 시도하였다. 모두해서 여섯 명인 우리 일행은 북한산성매표소 주차장에서부터 계곡을 타고 올랐다. 신용명 씨가 앞장서서 길을 잡아나갔다. 산을 치고 들어가는 기세가 남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전날 밤 비가 내려 바위가 무척 미끄러웠으나 그의 거침없는 이끌림에 홀려 우리는 심장소리가 점점 커지는 북한산으로 미끄러지듯이 스며들었다. 뚜렷하게 남아 있는 글자들, 흔적처럼 변해가는 글자들,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 알아볼 수 없게 쪼아 놓은 글자들, 한글자한글자에 대한 권효숙 씨의 설명 한마디 한마디는 북한산의 심장을 더 뜨겁게 뛰게 하였다. 신용명 씨에 이끌려 찾아든 ‘소리당’(신용명 씨가 붙인 이름). 바위로 지붕을 잇고 바위로 벽을 두른 천연암자였다. 바위로 쌓은 공간을 통해 그 굵기가 수십 가지나 되는 물줄기들이 그 굵기에 따라 공명으로 울려퍼지는 소리, 신용명 씨는 “이 소리는 아무리 시끄러워도 명상이 된다.”라고 했다. 바위에 새겨진 글자들이 역사의 통을 통해 울려퍼져 이처럼 소리를 내는 듯 했다. 우정을 다짐하기 위해 새긴 듯한 ‘칠유암(七遊岩)’이라는 암각 위에서 일곱 명의 단아한 선비들이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와 한 수 읊는 시와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빼어난 소리꾼이고 연주자여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소리였다. 깊어가는 가을 속에서 듣고 있노라니 우리는 절로 ‘육유암(六遊岩)’이 된 듯했다.신용명 씨는 두 손에 물을 담아 물에다 하늘을 비춰보고, 산빛을 비춰본다. 그리고는 물맛을 보며 말했다. “다른 산들은 비가 오고 난후 보통 4일에서 1주일 정도 지나야 물이 맑아지지만, 북한산은 하루 이틀이면 맑아진다.”며, “맑아진 상태도 설악산 등은 옥색이지만, 북한산은 비취색”이라고 했다. 중성문 앞에 보면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 되어 있는 암각이 있다. 권효숙 씨는 “또 다른 곳에는 더 심하게 훼손된 곳이 많다”며, 이는 “이름을 새겨놓을만한 사람이 아닌 사람이어서 후세 사람들이 지웠거나, 6.25 때 소작인들이나 머슴들이 인민군의 힘을 앞세워 지주에 대한 반감에 따른 반항 한 흔적”으로 보고 있다.태고사로 가는 길에서 부황사지로 가는 길로 접어드니 ‘청하동문(靑霞洞門)’이 나타났다. 청하-푸른노을, 신용명 씨는 이곳에서 그 노을을 발견했다고 한다. 여름 날 키 큰 나뭇잎으로 가려진 골에 바람이 한줄기 불면 하늘에서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 바로 ‘청하’라는 것이다. 그걸 발견한 신용명 씨도 대단하지만, 그걸 알고 그렇게 이름 지은 선인은 더더욱 놀라웠다. ‘청하동문’은 ‘백운동문(白雲洞門)’과 마찬가지로 주는 표석으로 사용된 듯하다. 북한산에는 봉우리마다 골마다 이름이 다 붙여있다. 이는 이곳이 산성이다보니 전술적인 필요에 의한 듯싶다.청하동문에서 조금 더 오르니 ‘최송설당(崔松雪堂)’이라는 암각자가 나타났다. 권효숙 씨는 여성의 이름이 크게 새겨져 있는데 고무된 듯 최송설당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시를 짓고, 육영사업을 하고, 집안을 일으켜 세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이 이곳에 새겨진 연유는 알 수 없으나 그로인해서 북한산은 북한산대로 최송설당은 최송설당대로 더욱 빛이 나는 듯했다.북한산 3대 명당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부황사지에 있는 부왕사(扶皇寺) 표석에는 ‘扶’자의 부수가 좌우가 뒤집혀 쓰여 있다. 이를 두고 신용명 씨는 풍수지리에 의해 쓰인 글자라고 했다. 좌측으로 백운봉가 있어 거기에 맞혀 지아비 부(夫)자를 먼저 쓴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북한산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해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고 김밥을 사서 이곳에서 먹었다. 명당이라서 그런지 쌀쌀한 날씨인데도 김밥은 정말 맛있었다. 신용명 씨가 챙겨온 빵이며 감도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다. 용학사 아래 비석거리 내 화강암 암벽에 새겨져 있는 승도절목문은 조선조 1855년(철종 6)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모두 325자로 되어 있는 이 명문의 내용은 19세기 중엽 북한산성 내의 사찰이 피폐하고 승도가 흩어짐이 승병대장인 총섭(總攝)의 책임인 바, 그의 임용 시 폐단을 없애달라는 요구서를 새겨 놓은 것이다.용학사 뒤로 민민한 바위에는 고려시대 때 것으로 보이는 불화기 새겨져 있다.노적사에서 태고사(太古寺)에 이르는 중간 지점 용학사 아래에는 이 선정비군이 있다. 총 26기로 이 중에 옥개석을 모두 갖춘 것은 몇 기 되지 않으며 대부분 훼손된 상태이다. 비분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본 비의 건립 시기는 모두 19세기 이후이다. 이중에서 ‘총융사 신공헌 애민선정비(摠戎使 申公櫶 愛民善政碑)’는 1870년 10월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 159cm, 폭 35cm, 두께 24cm의 규모이다. 총융사 신헌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고, 행주산성 현판을 쓴 사람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인물인데, 유독 이 사람의 비가 2기가 있는 것이 특이하다.선정비군 앞에는 복원이 추진되고 있는 ‘산영루’가 있다. 그 앞으로 철종 때 명필로 알려져 있는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김성근’이라는 이름이 북한산을 닮은 필체로 쓰여 있다.이밖에도 ‘괘궁암(卦弓岩)’, ‘불자인명(佛者人名)’, ‘노역각자(努役刻字)’, ‘송자각(宋字刻)’, 등이 있다.답사를 마무리하고 돌아서 나오는 길에 자판기에서 뽑아 마신 커피는 소중한 사람을 소개 받으면서 마시는 맛이었다. 잘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기고 있는데, 뒤에서 우리 중에 한 명이 남아서 ‘잘 가라’라고 인사를 했다. 누군가 싶어 돌아보고, 인원수를 확인해봤지만 빠진 사람은 없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북한산은 이미 우리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