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땅과 한강의 투쟁사

이가순 송덕비를 통해 재분석

2007-05-02     고양신문

1990년 9월 12일 새벽, 한강 유역에 집중된 호우로 말미암아 혹자는 의도적인 인재라고 주장하는 김포대교 바로 아래쪽에서의 제방 붕괴가 있었다. 현재 주엽동 오마중학교가 있는 자리까지 물이 차 올라 83개의 자연마을이 완전 침수된 대참사였다. 1916년부터 1969년까지 관측된 통계자료에 의하면 한강유역에는 총 118차례의 홍수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렇듯 일산은 한강에 의해 운명이 좌우되는 지역이었으며 일산 역사의 대부분은 물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압축할 수 있다. 지금도 행주동에 가면 ‘이가순 공덕비’라고 써있는 비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서민들이 자력으로 한강과 싸워보려는 의지의 흔적이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부터 90년 대홍수까지 범람과 복구의 역사를 더듬어본다.


1990년 9월 일산 신도시 건설계획 발표와 보상 문제 등으로 뒤숭숭하던 추석을 며칠 앞둔 12일 새벽, 한강 유역에 집중된 호우로 김포대교 바로 아래쪽에서의 제방이 터지고 만다.
고양신문의 당시 기사를 보면 긴박함과 절절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추수를 앞두고 황금빛 벼이삭이 출렁이던 일산평야지대는 거대한 흙탕물과 쓰레기 호수로 변하고 가축은 집단적으로 농장에서 익사했다. 범람한 흙탕물은 “뻘로 시집간다”는 얘기를 들었던 주엽동 현재 오마중학교 근처의 옛 오마리 동네 안마당까지 찰랑거렸다.
옛 오마2리 동네에 살던 오수길 고양문화원장에 따르면 집 안마당까지 물이 들어오자 젊은이들이 창고의 곡식을 산으로 옮겨야 한다며 혼비백산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 문화원장의 부친은 마루에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 “물이 더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며 만류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도 물이 거기까지만 들어왔으니 더는 잠기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물은 정확하게 안마당까지만 들어왔고 주교동도 고양시청 앞 내리막길 도로 밑까지 물이 들어와, 65년 전 을축년 대홍수의 침수지점과 정확히 일치했다고 한다.
행주동과 능곡, 행신동, 옛 백마역, 현재의 백석동 일산병원, 송포동, 대화동 권역은 모두 물바다가 됐고 장항동 고양교육청, 롯데백화점과 일산아람누리 사이까지 물이 들이닥쳐 한 마리의 가축이라도 살려보려는 처절한 농민의 사투가 며칠째 이어졌다.

“키우던 젖소 30마리 가운데 단 한 마리만 건지고 나머지는 모두 잃어버렸어요. 앞으로 세 남매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란 말입니까.” 대교목장 여주인 김영자(45)씨는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고양신문 1990년 9월 20일>

- 홧김에 낮술을 마신 한 주민은 벌게진 얼굴로 “농산물 개방 자꾸 하는데 소라도 많이 죽여야 또 수입할 게 아니냐”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정부가 언제 농민 위한 적 있습니까. 차라리 잘 됐습니다. 만날 농사지어봐야 손해만 보는데 이번 기회에 아예 농사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갈랍니다.” 10년 동안 젖소를 키우며 3마리를 31마리로 불려 TV프로 <앞서가는 농민>에 소개된 적도 있다는 이씨는 다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는 하늘을 보며 힘없이 말했다. <한겨레 1990-09-15>

고양군에 의해 최종 집계된 피해 상황을 보면 83개의 자연마을이 침수되고 1만5000여 가구에 5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6인의 인명피해까지 생겼다. 완파된 가옥은 1806동에 달했고 5117ha의 농경지가 침수됐으며 1만2622마리의 가축이 물에 휩쓸리거나 축사에서 그대로 죽어갔다.
이 홍수 여파로 정부는 해발 4~5m의 신도시 지역 지반을 10m 높이로 올리고 서둘러 자유로 신설공사를 발표하면서 제방붕괴의 위험성은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추석뿐만 아니라 다음해 설날도 하우스와 컨테이너 박스에서 지냈던 대다수의 농민들은 쥐꼬리만한 수해보상금에 허덕여야 했다. 신도시의 건설과정에서 일부는 토지보상금으로 위안을 삼았지만 나머지는 손에 쥔 것 없이 타지로 떠났다. 그리고 몇 년 후 일산은 거대한 아파트 숲으로 상전벽해(桑田碧海)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