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다리 비석에서 읽는 역사 한 자락
효종의 북벌론과 고양지역의 유적
‘경기도고양군덕명교비’라고 표기된 비석 하나가 곡릉천 옆 중소기업은행 연수원 내에 있다. ‘경기도고양군덕명교비’는 한양과 개성, 평양,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연결되는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도로 중 하나였던 관서대로에 위치하고 있어 수많은 사람과 물자, 그리고 정보와 문화가 오가는 곳으로 그 중요성이 지대했다. 또 곡릉천 인근에는 명나라 궁녀 굴씨의 묘도 있다. 이에 효종시대와 깊은 연관이 있는 비석과 굴씨의 이야기를 토대로 ‘북벌론’과 관련된 역사적 상상을 펼쳐보고자 한다.
/취재·사진 김한담 전문기자(전통예술문화원 하누리 대표)
7년 간의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 살림과 백성의 생활은 광해군시대를 거치며 조금씩 안정됐으나 반정을 일으켜 등극한 인조시대에는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외면하고 존명배청을 주장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해 다시 한 번 나라가 위기에 몰리게 된다. 이로 인해 인조가 청 태종 앞에서 친히 삼고구례를 올리고 세자를 비롯한 수많은 왕실인사와 사대부, 일반 백성이 인질로 끌려가는 상황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에서 생활하던 세자 소현세자는 청나라를 통해서 들어오는 다양한 선진문물과 철학을 대하면서 조선의 변화를 꿈꾸었으나 귀국 후 인조와 존명배청의 주자학으로 무장한 대신들의 극렬한 견제 속에서 어느 날 의문의 돌연사를 당하고 효종이 등극하게 된다.
인조의 통치행위와 반정공신의 위세에 불만을 품었던 사림들이 효종의 등극으로 대거 정계에 진출하면서 북벌을 꿈꾸었던 효종은 신진 사림세력을 등에 업고 재위기간 내내 청나라 정벌 욕구에 불타올랐다.
또한 효종은 친위병인 금군(禁軍)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6백여 명의 금군 전체를 기병군으로 변화시키고 나아가 1655년 금군의 병력을 1천명으로 확대했으며 훈련도감도 증강시켜 나갔는데 특히 이때 제주도에 표류해와 있던 네덜란드인 하멜(Hamel)일행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신식 총기를 제작하게 했다.
북벌의 열기는 더욱 확대해 민가에서 좋은 말을 기르게 하고 마을에서는 수백 명을 모아 활과 조총의 사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실학자 유형원은 청나라의 지형과 요새를 자세하게 기록한 중흥위략(中興偉略)을 지어 효종에게 바쳤으며 국외 정세의 혼란을 틈타 북벌계획은 더욱 박차를 가한다.
북벌론 한창때 건설된 신원동 교량
이러한 국가정세와 사회적 분위기가 성도 한성에 가까운 고양지역에도 휩쓸고 있던 시점에 ‘덕명교비’에서 기록한 신원동 교량이 건설된다. 관서대로에서 곡릉천은 길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으나 장마철이면 인근 주민이 동원해 만들었던 흙과 나무로 만들었던 삽다리가 떠내려가 우마차의 통행은 물론이고 사람들조차 멀리 우회하거나 그냥 건널 수밖에 없던 실정이었다. 이에 ‘조선남’이란 독실한 불교신자와 700여명이 넘는 다양한 계층의 지역민이 함께 석교를 건설한다. 작게는 통행에 불편을 겪고 있는 백성을 위한 선덕(善德)이었다면 크게는 군비확충에 나라의 온 힘을 쏟고 있는 시점에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지역 민중의 힘으로 일궈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문의 일부를 옮겨보면 “매양 새벽에 나와서 힘들여 나무를 잘라 다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물의 본성은 억세고 사나워서 조금만 비가 내려도 반드시 무너져서 자주 번거롭게 고쳐 만들어야 하므로 백성들의 노동력을 크게 해친 것이 지금까지 대략 300년이 되었다. 순치 11년에 신사 장○미와 석공 거사 조선남이 뜻을 같이 하는 ○동손 · 김말생 등과 의논하여 …… 4년 만에 다리가 완성되었으니, 아아! 아름다운 일이다. 이 사람의 공적이여! 억만 년 동안 없어지지 않을 업적이 여기에 있구나. 큰비에 …… 그 공적이 지금까지 ……. 돌다리가 평평하게 되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이 다리를 지나가야겠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임금님이 하는 국가 일이란 잠시도 쉴 틈이 없어서, 일에 종사하는 사람과 따르는 자들의 그 두 공로가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비가 오게 되면 …… 양주와 고양의 백성들이 지금부터 후대에까지 …… 또 장릉 행차에 임금님의 수레를 받들어 모실 때에도 …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곧 다리를 만든 사람의 충성과 정성을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찬양의 노래를 부르기를 그만 둘 수 없을 것이다”라며 다리의 중요성과 건설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있다.(비문의 훼손으로 일부 내용은 해독이 어려움)
비록 비석에는 다리의 길이와 폭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대규모 정벌군이 건널 수 있는 크기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 시대 교량 건축의 최고 기술인 ‘홍예교’로 건설했다는 글을 보면 현재의 곡릉천의 폭과 비교해 정교한 기술로 커다란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북벌을 소원했던 명나라 궁녀 굴씨
곡릉천 인근에는 최영장군 묘와 함께 풀이 나지 않은 적분이 있는데 이는 명나라 궁녀 굴씨의 묘다.임진왜란 때 종묘의 제례는 물론이고 다양한 궁중의식에 대한 기록이 전란에 소실돼 예법이 전승되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 명나라 궁녀 몇이 입국한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할 때 함께 데려온 것이다. 그중 굴씨라는 궁녀가 있었는데 굴씨가 명나라 황실의 의례에 관한 많은 예법을 조선에 알려주어 현존하는 종묘제례를 포함, 다양한 의례를 복원할 수 있었다. 굴씨는 조선에서 정중한 대우를 받았고 죽어서는 평생소원이었던 청나라의 멸망을 보기 위해 북벌군이 지나갈 예정이었던 관서대로 한켠, 곡릉천을 지나 약 십여 리를 더 가면 있는 대자산 길가에 묻혔다. 이 굴씨의 묘는 불과 100여 년 전까지도 조선 왕실의 궁녀들이 제사를 지내 주며 그의 높은 공을 칭송하고 기억했던 곳이다.
이처럼 곡릉천의 덕명교와 인근 굴씨 묘, 그리고 그 시대 상황을 연결해보면 고양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대부가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효종의 북벌론을 찬성하는 나름의 여론이 형성돼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정력적으로 추진된 북벌 계획은 명나라의 잔존세력의 이렇다 할 활약이 없는 상태에서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막기 위한 청의 요구로 두 차례(1655년, 1659년)에 걸쳐 러시아에 정벌군을 보내야 했으며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되면서 송시열을 비롯 왕권 강화에 반대하는 집권세력의 반발로 제동이 걸려 지지부진하게 된다.
급기야 1659년 4월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 자리에서 “9월에 단풍이 들면 그때 다시 부르리라”고 약속하고서 이내 죽음을 예감하였듯이 “후일의 모임을 어찌 반드시 기약할 수 있으리오”라는 말을 되뇌어 우리가 흔히 대표적인 조선 왕 독살사건이라 하는 미스터리한 죽음을 5월 4일 맞이했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와 적대적 관계를 청산해 덕명교는 다양한 선진문물을 들여오는 길목, 문화교류의 길로 기능했고 이제는 1755년 <고양군지>에 “돌다리가 있었으나 허물어졌다”라는 기록과 함께 비석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