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경고했던 황윤길과 사림정치

2007-08-16     김한담 기자

황윤길 : 틀림없이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김성일 : 신은 그와 같은 정황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같은 날 같은 곳에 다녀온 두 사절이 이처럼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황윤길은 경험한 여러 가지 일을 예시하며 장황하게 전쟁의 조짐을 말했으나 김성일은 그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선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관상이 어떤지를 물었다.

황윤길 : 그 눈빛이 밝게 빛나 담략과 지혜가 있는 듯이 보였습니다.

김성일 : 그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들이 임금 앞에서 물러 나오자 곁에 있었던 이조판서 유성룡이 김성일을 잡고 물었다.

유성룡 : 그대의 말이 황윤길의 말과 다른데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장차 어찌하겠소?

김성일 : 내 어찌 왜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현혹되므로 이를 풀어보려는 것이오.


<선조수정실록>에 이 이야기를 적으면서 사관은 이렇게 평가했다. “황윤길이 장황하게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아뢰어서 인심이 요동쳤으니 사리에 어그러진다. 김성일은 황윤길 등이 그쪽에 도착해서 겁을 집어먹고 체통을 잃은 것을 통분하게 여겼기 때문에 말끝마다 이처럼 설 어긋났다. 그때에 조헌이 힘써 일본과 화의를 반대하면서 왜적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임금이 황윤길의 말은 실세한 서인이 인심을 어지럽히려 하는 것이라고 여겨 배척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감히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중

전쟁의 위험을 경고한 황윤길의 묘가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군부대 안에 있다. 병조판서까지 지냈으나 졸한 연도는 파악되지 않는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友松堂)으로 조선 초 명재상 황희(喜)의 5대손이다. 1561년(명종 16)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563년 정언을 거쳐 1567년 지평이 됐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583년 황주목사를 지내고, 이어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시기에 병조판서를 지냈다. 1590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선임돼 부사 김성일, 서장관(書狀官) 허성과 함께 수행원 등 200여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거쳐 대판(大阪)으로 가 일본의 관백(關伯) 도요토미(豊臣秀吉) 등을 만나보고 이듬해 봄에 환국해, 국정을 자세히 보고했다.

서인에 속한 그가 일본의 내침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강구했으나, 동인에 속한 김성일이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 것 없고 군사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다고 엇갈린 주장을 해 일본 방비책에 통일을 가져오지 못했다. 이리하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이 당시 그의 말을 좇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한다.
이렇듯 임진왜란의 가능성에 대한 상반된 견해에는 황윤길과 김성일의 개인차뿐만 아니라 서인과 동인이라는 세력다툼이 배경에 있었다.

을해붕당으로 동인·서인으로 갈려

중종의 기묘사화와 명종 대 을사사화로 많은 사림이 희생된 이후 명종의 비 인순왕후의 동생이었던 심의겸은 또 다른 사화를 획책하고 있던 권신들을 몰아내고 선조 대에 퇴계 이황과 휴암 백인걸 등 사림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종부터 선조까지 네 임금을 섬긴 명망 높은 조정의 원로 이준경이 죽기 전에 왕에게 차자(箚子)를 올려 붕당의 조짐을 시사하고 예방할 것을 건의하는데 그의 예견대로 1575년 마침내 동인과 서인으로 사림이 갈라지는 을해붕당(乙亥朋黨)이 발생한다. 청요직의 으뜸가는 직책 이조정랑(정5품) 자리를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의 충돌이 빚어낸 결과였다.

새로이 부상하는 신진세력의 구심점이었던 김효원은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심의겸을 정치일선에서 가장 먼저 배제해야 할 척신과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림은 심의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당파가 나누어지는데 당시 김효원의 집은 한양 동쪽의 건천방(乾川坊)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은 서쪽인 정릉동(貞陵洞 구 러시아 공사관 자리)에 있어 이런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동인들은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로 유성룔, 우성전, 김성일, 남이공, 이산해, 이원익, 이덕형 등 소장파 인사들이 주축을 이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로 정철, 송익필, 조헌, 윤두수, 이산보 등이 주축이었다. 율곡 이이는 이들을 조정하고자 애썼으나 교우관계 때문에 서인의 지지를 받은 반면 동인의 배척을 받았고 사망 후에 서인의 종장(宗長)으로 추대된다.

급기야 야밤에 의주로 피난

 

이이가 죽은 후에 서인은 세력을 잃어 동인에게 밀렸지만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 벌어진 기축옥사를 통해 정국을 좌의정 정철 등 서인이 주도하는 상태에서 이산해, 유성룡 등 극히 일부의 동인이 선조의 신임을 얻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1591년 세자책봉문제로 선조의 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서인은 실세하지만 동인은 퇴계와 남명의 사상적 차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끝내 갈라설 수밖에 없는 한계를 제공해 남인과 북인이라는 두 세력으로 나누어지게 됐다.
이런 와중에 이 해 조선은 일본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키로 했다. 정사(正使)에는 서인 황윤길, 부사(副使)에는 동인 김성일, 서장관(書狀官)에 동인 허성이 임명됐다.

이듬해 4월 왜군은 파죽지세로 쳐 올라오지만 속수무책이었던 조선은 급기야 야밤에 의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지금도 논란이 분분한 경복궁과 종묘를 왜군이 불태웠는가, 한양의 백성들이 분노하여 불태웠는가 하는 황망한 피난이었던 것이다. 의주로 피난간 뒤에도 이들은 끊임없이 다퉜으며 명나라에 급히 원군을 청하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많은 의병의 활동으로 전쟁을 막을 내리게 된다. 경의(敬意)와 실천을 중시한 남명 조식의 학풍을 이어받아 의병장을 많이 배출한 북인 세력은 절의를 중시하고 강력한 척화를 표방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으며 임란당시 선조의 비겁함에 반해 많은 공적을 쌓은 광해군을 이들과 백성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중 선조의 급작스런 서거로 인해 등극하게 된다.

선비 정치참여는 춘추시대부터

고려말 조선 초 신흥 사대부들이 집권하여 세종조 집현전 인재들까지를 활동하던 시기를 사대부 정치기라 이른다. 이후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통해 등극하면서 공신이 생기는데 이후 성종 때까지 250여명의 공신이 등장하고 이들이 정권을 휘두르는 세조, 중종대를 훈구파정치기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사림의 바탕이 되는 선비의 정치 참여는 중국의 춘추시대까지 소급된다. 춘추시대 공자(孔子)는 주나라 종법(宗法)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심화된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주례(周禮)로 복귀할 것을 주장한다. 공자가 주장한 주례로의 복귀는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사회변화를 통해 영향력을 획득한 지식인(士) 중심의 유신(維新)된 사회 건설을 목표로 했다. 그는 이러한 사회를 실현하는 주체로 지식인인 군자(君子)를 상정했으며 군자의 육성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교육자요, 철학자였다.

군자론에 따르면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사회윤리의 근간이며 이의 도덕적 실천(仁)이 필수적이다. 도덕적 실천을 통해 국가를 통치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공자의 덕치주의(德治主義)는 맹자(孟子)의 민본사상과 혁명사상으로 계승됐다. 맹자는 통치자가 덕치를 행하지 못하면 쫓아내도 된다는 생각을 하였고 사회 생산력의 촉진보다 생산물의 정당한 분배를 통해 백성의 신뢰를 얻는 것을 더욱 중요시했다.

당쟁은 지연·혈연·학연 대립 수반

공자와 맹자의 유교적 실천윤리는 한ㆍ당 시기 경전에 주석을 다는 훈고학으로 경전적 기초를 다졌으며 송대에 이르러 도교와 불교의 형이상학을 가미함으로써 철학적 이론체계를 확립하고 우주와 인간을 연결하는 주자학(朱子學)으로 발전하게 됐다.
중종대에 조광조 등이 주장했던 도학정치는 이런 주자학의 이념을 현실정치에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은 도학정치를 내세워 공신과 권신의 부정부패를 공격해 사회에 청신한 기풍을 불러 일으켰지만 명종 말기 권신세력이 사라지면서 사림이 분열, 붕당이 생기고 붕당간에 당쟁이 일어나게 됐다. 붕당은 학연, 지연을 중시했고 당쟁은 필연적으로 지역적 대립과 혈연, 학연적 대립을 수반했다.

붕당의 정쟁 도구는 도덕적 수양 여부와 명분, 의리였으나 그 근본은 권력투쟁이었기 때문에 당당함은 사라지고 명분이나 의리를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경우가 잦아지게 된다. 당쟁이 사림정치의 본령에서 벗어나 권력만을 추구하면서 그 폐단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자 영조, 정조시대의 탕평책이 등장하지만 그 결과 외척 세력의 급성장과 정조 이후 무능한 국왕으로 인하여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사림정치의 와해와 함께 견제세력이 사라지고 정권은 부패하기에 이른다. 결국 조선은 민란에 속수무책이었고 외세의 침입에도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취재·사진 김한담 전문기자(전통예술문화원 하누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