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 만들어진 세계 최고의 지도
우이정 이무 선생과 옛 지도 이야기
조선 초 제작된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뛰어난 지도로 인정받고 있다. 이 지도는 국가적 사업으로 진행됐는데 여기에는 우의정이었던 이무 선생이 큰 역할을 했다. 이무 선생은 한국의 지리학, 지도제작사에 영원히 그 이름이 등재돼 있는 중요한 인물로, 그 묘는 고양시에 향토유적으로 보존돼 있다. 이번 호에는 현재 일본 교토 류오고쿠 대학(龍谷大學)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옛 지도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취재·사진 김한담 전문기자(전통예술문화원 하누리 대표)
통상 옛 지도라 하면 딱딱하고 진부한 느낌이 풍기는 것 같다. 지리부도에 등장하는 각종 투영법을 사용한 지도들, 위성사진, 지구본 등과 같은 서구과학문명의 영향으로 우리의 옛 지도를 현대과학의 영역에서 해석하길 유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 지도와 서양의 과학과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옛 지도는 과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역사의 기록이며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다. 단순히 지리적 실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을 넘어 그 시대, 그 지역에서 살았던 인간들의 신념과 가치체계, 더 나아가 주변 세계에 대한 꿈과 희망도 아스라이 스며있다. 이처럼 옛 지도는 당대 과학과 예술이 어우러진 독특한 문화 속에서 탄생되며 지역 간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옛 지도는 당대의 과학과 예술, 그리고 사상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에 옛 지도를 읽는 데에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옛 지도는 다른 문자언어에 비해 그래픽 언어의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한자만 알면 누구나 정교한 판독지식 없이도 접근이 가능하다. 특히 산수화처럼 그려진 그림지도는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딱딱한 기호와 도형으로 이루어진 현대지도에서 맛볼 수 없는 회화와 같은 예술작품의 성격의 지도는 땅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뛰어넘어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작은 우주로서 과거 삶터의 모습을 보여주는 색다른 묘미가 옛 지도에 스며있다.
옛 지도들은 현대의 지도 못지 않게 목적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지역 간 문화교류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세계지도, 국토에 대한 인식체계가 반영된 전도, 지방행정구역인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을 그린 군현지도, 왕권을 상징하는 장소인 도성을 그린 도성도, 군사적 목적으로 제작되는 관방지도 등으로 크게 분류된다. 이 외에도 풍수지리(風水地理)의 관념에 입각한 산도(山圖), 여행할 때 이용했던 작은 휴대용 지도, 궁궐의 배치를 그린 궁궐도, 하늘의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 토지의 소유관계를 경계로 표시한 지적도 등 실로 다양한 유형의 지도가 제작됐다.
문무를 겸비해 대마도 정벌한 인물
우리나라의 지도제작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요동성 지도와 <삼국사기>의 기록들은 일찍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지도 제작이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전통시대 지도는 국가 통치의 기본적인 자료가 되기 때문에 국가기관에서는 지도 제작을 통해 국토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특히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 지도는 군사작전의 필수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도제작의 전통은 고려왕조를 거쳐 조선왕조로 이어졌는데, 조선초기부터 지도 제작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조선의 건국초기인 1402년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는 세계지도가 국가적 사업으로 대사성 권근, 좌의정 김사형, 우의정 이무, 검상 이회 등에 의해 완성됐다.
그 중 우의정 이무(李茂)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돈부(敦夫)이며 사후 익평공(翼平公)으로 추증된 분이다. 이무 선생은 당시 문신으로는 드물게 문무를 겸비해 수많은 왜적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며 1396년에는 김사형(金士衡)과 더불어 5도의 병선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일본의 이키섬(壹岐島)과 대마도를 정벌했다. 1402년(태종 2)에 우의정이 됐으며,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에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가 됐으나 1409년에 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 민무질의 옥사에 관련돼 창원으로 유배됐다가 안성군 죽산(竹山)에 옮겨져 그곳에서 사형됐다. 후일 신원돼 현재 덕양구 주교동 원당중학교 뒤편 약수터 인근에 그 묘와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의 권위·왕권 확립하는 기능도
이무 선생이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당시 제작된 세계지도 중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뛰어난 지도로 인정되고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일본 교토 류오고쿠 대학(龍谷大學)도서관에서 소장 중이다.
조선 초기 수도 이전과 행정구역의 개편 그리고 압록강·두만강 유역일대의 영토회복과 주민 이주 등 일련의 국가적 사업을 추진하면서 조선왕조는 각 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리 정보가 필요하게 됐다. 또한 대외적으로 불안정한 북방 영토 및 고려 말 이후 잦은 왜구의 침입 등에 대비하기 위해 세계지도의 제작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지도 제작은 행정·국방상의 필요성 이외에 조선왕조의 국가적 권위와 왕권을 확립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즉, 중국 중심의 세계에 조선왕조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세계지도를 통해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지도 하부에 적혀있는 양촌 권근의 발문을 참조하면 정종 1년(1399)에 김사형(金士衡)이 명(明)나라에서 가지고 온 원(元)의 이택민이 만든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1330)’와 승려 청준(淸濬)의 ‘역대제왕혼일강리도(1328)’의 두 지도를 합해 개정한 것인데 ‘성교광피도’에는 요수(遼,水, 중국의 랴오허) 동쪽과 우리나라가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태종 1년(1401)에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일본 지도에 일기도(壹岐島), 대마도(對馬島) 등을 보충하고, 우리나라와 일본을 그려 넣어, 보다 완전한 세계 지도를 작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담긴 세계지도
158cm×168cm 크기의 이 지도는 조선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거의 유일한 세계 지도로 조선 초 세계 지리학의 지식을 결산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전체적인 지도의 모습을 보면, 지도 가운데에 중국이 있고 중국 오른편에는 조선과 일본이, 왼편에는 아프리카와 유럽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과 조선은 매우 정확하며 하천과 도서를 자세히 그리고 있다. 특히 중국의 강은 매우 자세히 표현돼 있어 중국 남부지방은 마치 수많은 섬처럼 보인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황하(黃河)강은 다른 강들과 달리 노란색으로 표현됐으며 만리장성도 뚜렷이 나타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산줄기가 비교적 자세히 표현돼 있어 두 나라의 지형적 특징을 비교할 수 있다. 일본은 비록 방위는 틀리지만 혼슈(本州)와 규슈(九州)의 형태가 비교적 정확하게 표시돼 있다. 이 지도의 가장 큰 특징은 중국과 한반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크게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한편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는 실제보다 작게 그려져 있지만 100여 개의 유럽 지명과 약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포함돼 있다. 특히 아프리카의 가운데에는 사하라 사막이 그려져 있고 북쪽으로 흐르는 나일 강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지중해는 바다가 아닌 강으로 표현됐다. 이에 비해 인도와 인도차이나 지역은 오류가 심하다. 인도는 반도가 아니라 단순한 해안선으로 연결된 육지처럼 표현됐고 인도차이나의 여러 나라들은 남쪽 바다 위의 섬들로 나타나 있다.
조선 지도는 함경도의 동북단을 제외하고는 <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보다 오히려 지형이 정확하고, 더 많은 섬들이 그려져 있다. 이 조선 지도는 이회가 작성한 팔도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는 가깝게 일본과는 멀게 표현
이 지도에는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4배정도 크게 그려져 있으며 심지어 아프리카 대륙보다도 더 크게 그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이 지도에 가운데에 놓여 세계 육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보아 중화적 세계관이 반영돼 있다. 한편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거리는 매우 가깝게 그린 반면 일본과의 거리는 멀게 표현했고 동서 방향의 일본을 남북방향으로 나타냈다. 즉, 우리나라에 중요하고 우리가 지향하는 중국은 크고 가깝게 그린 것이고, 중요하지 않고 관심도 적은 일본은 멀고 작게 나타낸 것이다.
이후 15세기 세종 때에는 각 군·현 간의 거리측정이 이뤄지고 백두산과 한라산의 위도 측정 등을 통해 보다 과학적인 지도제작의 기틀이 확보됐다. 17세기 이후로는 중국을 거쳐 서구식 세계지도가 도입되어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18세기 중엽에는 조선후기 지도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정상기의 ‘동국지도(東國地圖)’가 제작됐다. 이러한 지도제작의 흐름은 고산자 김정호에 이르러 완결된다. 김정호는 1834년 전국 지도책인 필사본 ‘청구도’를 제작하고 이어 1861년에는 조선지도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대동여지도’를 목판에 새겨 간행했다.
조선 초 권력투쟁의 희생양으로, 태종의 처남들의 옥사에 휘말려 죽음을 당했지만 이무 선생은 우리 고양의 자랑스런 인물로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당시 지도제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도 공을 높이 살 수 있다. 고양시에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원본 크기로 석비를 만들어 답사를 오는 방문객들이 탁본해 갈 수 있도록 한다면 선생의 공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