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된 화정 지석묘로 상상하는 청동기 시대

대석과 상석 사이 파헤쳐져 … 24개의 성혈 발견

2007-09-21     김한담 기자

덕양구 화정동 LG마트 근처 성신초등학교 앞 큰길 건너편에 낮은 언덕 사이로 화정 꽃마을이라는 좁은 길 안내 표지판을 따라 가면 화정동으로 통합되기 전 길이 무척 질퍽하다고 하여(아마 지렁이가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유래된 지렁동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 지렁산 방향으로 약수터 겸용의 오솔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고 그 아래 오솔길 왼쪽에 고인돌이 두 개, 오른쪽에 하나가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취재·사진 김한담 전문기자(전통예술문화원 하누리 대표)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고인돌이 많은 국가에 속한다. 고인돌은 선사시대 돌무덤으로 일본에서는 지석묘, 중국에서는 석붕,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으로 불린다. 땅속이나 위에 주검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얹는 방식의 무덤 또는 제단의 일종이다.

고인돌은 거의 세계 전역에 분포하는데, 그 중 동북아시아의 중국에는 340여 기, 일본에는 600여 기, 한반도에는 3만여 기가 분포한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돌칼·화살촉·토기 등 껴묻거리(부장품)로 미뤄 청동기시대∼철기시대 초기에 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 고조선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양시에도 고인돌이 있다. 보존가치가 없다고 판단돼서인지 산을 오르다보면 마음 좋은 넓적 바위로 방치된 돌을 만나게 되는데 이 돌이 바로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다. 고양시의 고인돌은 근접한 파주의 당하리·다율리·덕은리 고인돌군, 강화도에 산재한 고인돌과 함께 한강 서북부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북방식, 남방식이 혼합된 고인돌의 형태다.
고양시에서 발간한 문화재대관에 따르면 지렁산 지석묘라 이름 붙인 이 고인돌은 도굴된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상석을 받치고 있는 대석과 상석 사이가 파헤쳐져 방치되어 있다는 것. 실제 그곳은 등산객들이 어지럽힌 쓰레기와 낙엽으로 채워져 있다.

청동기 제작도구 소유한 강력한 왕국 존재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돌처럼 보이지만 이 고인돌은 가좌동, 문봉동, 신원동 등지에 분포한 고인돌과 함께 청동기 시대 제후국으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적 실체다. 벽제 원당 신도 일산 등지에서는 고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인 갈아 만든 돌도끼, 토기류 등도 출토되고 있어 이 같은 역사를 뒷받침한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특기할만한 유물이 있는데 바로 청동기 제작도구다. 청동기 제작도구는 왕국(부족국가) 이상의 지위를 가진 세력이 고양시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청동기원료(구리, 주석)와 청동 주조기술을 확보했다는 것은 곧 문명에서 뒤떨어지는 여타 세력에 대한 우위를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
이렇듯 우리 고양은 창릉천과 곡릉천을 끼고 선사시대 문화를 발전시키며 삼한시대 철기문화로 진입해 마한의 한 나라로 성장했을 것이다. 54개 국(國)으로 구성된 마한의 연맹체 중에 고양지역은 한강을 끼고 서해안을 통한 연안 항해의 거점지역으로, 또 서해안에서 인천을 거쳐 내륙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던 해상 세력의 관문으로, 그 역할이 마한에서도 지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정동 고인돌에서 상상하는 한반도 신화

 

약 2300여 년 동안 고조선이란 국가의 기틀을 가진 이 위대한 나라의 강역은 서쪽으로 중국북경 근처의 난하, 북쪽으로는 어르구나하, 동북쪽으로는 흑룡강, 남쪽으로는 한반도 남부해안을 경계로 하며, 한반도에 분산되어 있던 부족국가를 통합해 탄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환인으로 기록되는 하느님을 수호신으로 모신 선진문명의 이주민 조선족(환웅족)과 곰을 수호신으로 모신 곰족(고구려족)의 결합이 곧 단군 탄생신화다. 굴은 곰이 여자로 탄생한 곳, 즉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한다. 일본은 고구려를 ‘고마’, 곰을 ‘구마’라고 한다. 우리말 ‘곰’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그 연관성을 짐작케 한다.

환인에서 ‘환’은 밝음, ‘인’은 비롯함이란 한자어로, 밝음의 시작 즉 태양을 뜻한다. 필자 사견으로는 바이칼호에 자리잡고 있던 태양을 숭배하는 환인부족 족장의 후손 환웅이 ‘밝산’이라 표기하는 백두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어 하느님의 지상 도읍지를 만들고 황하 이북과 만주일대, 그리고 한반도에 삼신(풍백, 운사, 우사)과 세 개의 천부인, 삼천의 이주민, 곰이 인간으로 변화된 기간인 삼칠일 등의 삼위일체사상의 선진문명을 가지고 이곳 원주민과 결합해 중국한족보다 수백 년 전에 청동기 문화를 발흥시켰다고 본다.
이 작은 화정 고인돌에 서면 신화시대와 역사시대를 넘나드는 역사적 상상의 나래가 끝없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 소중한 유산은 여느 바위와 다를 바 없이 방치돼 등산객의 무심한 휴식처가 되고 있을 뿐이다. 목이 타면 산아래 약수터에서 그 목마름을 달랠 뿐, 청동기 시대의 유물을 보존하자는 목소리에는 반향이 없다.


‘한들(큰 들)’이 ‘흰돌’, 백석(白石)으로

 

일산 평야, 즉 일산은 ‘밝한’, ‘큰’, ‘일’ 등의 ‘넓다’ ‘크다’ ‘한없다’라는 고어 한글 단어와 들판이 어우러져 ‘큰들’, ‘한들’로 불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양은 ‘한들’ 평야를 끼고 있어 마한에서도 제 부족간의 교류 요충지로서의 몫과 더불어 선진문화의 유입, 경제교류의 교두보로 그 비중이 컸을 것이다.

그러다가 일제시대쯤, 혹은 그 이전쯤에 ‘한들’이 흰돌, 즉 백석(白石)으로 변형됐을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민중 변혁설화, 또는 미륵신앙인 백마, 마두, 오마리의 소년장수와 백마설화와 어울리는 탄생설화<박스기사 참조>를 껴안고, ‘흰돌’로 부르는 아이러니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음은 백석동의 흰돌에 얽힌 설화다.

오마리의 소년장수와 백석동 흰돌 이야기

옛날 고양시의 각 마을들이 처음으로 이름을 짓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다.
다른 마을들은 모두 어엿한 이름을 지어 쓰고 있었는데 유독 일산의 남쪽 끝에 위치한 한 마을은 이름을 짓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이 마을의 앞으로는 한강으로 흘러가는 시냇물이 있고 또 넓은 들판이 있어 살기는 아주 좋은 곳이었으나 마을의 이름이 없어 늘 다른 마을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큰 홍수로 한강의 물이 갑자기 불어나더니 한강 상류 쪽에서 하얀 돌 하나가 떠내려와 이 마을의 한쪽 산 귀퉁이에 걸려 멈췄다.
이 하얀 돌 위에는 갓난아이 하나가 타고 있었는데, 갓난아이의 눈빛이나 기개가 여느 아이와는 확연히 달랐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와 흰돌이 하늘에서 내려준 신령한 것이라 믿고 정성껏 아이와 돌을 돌보았고, 마을 이름도 백석(白石)이라 정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백석 마을은 날로 크게 번성하고 좋은 일만이 생겼다.

그리고 이런 하얀 돌과 아이에 얽힌 소문은 이웃 마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옆 마을의 혹부리 영감은 이를 시기해 백석 마을 사람들 몰래 아이를 자루에 담아 한강에 버리고 바위마저 깨뜨려 버렸다. 그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와 벼락이 치더니 혹부리 영감을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후로 백석 마을도 점차 쇠퇴해 가고 예전의 부귀영화는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인원 동원했던 계급의 상징 ‘고인돌’

고인돌과 입석(선돌)은 거석을 이용한 구조물로 거석 문화의 상징이다. 크게 보았을 때 이집트나 마야의 피라미드, 중동 지방의 각종 석조물, 프랑스 서북부 대서양 연안 지역의 거석렬(거섥렬)과 영국의 스톤헨지 등이 모두 이 거석 문화의 산물이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고인돌은 크게 2형식이나 3형식으로 분류되는데, 60년대 이후 3형식으로 분류해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으로 나뉜다.
탁자식은 넓고 편편한 4개의 판석을 땅 위에 세워 방을 만든 다음 시신을 안치하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는 것으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인돌의 형태이다. 주로 한강 이북에서 주로 발견되어 북방식이라고도 한다. 전북 고창에서 발견된 것이 가장 남쪽에 위치한 것이다.

바둑판식(기반식 基盤式) 고인돌은 무덤방(墓室)을 지하에 만들고 그 위에 4~8개의 받침돌을 놓은뒤 커다란 돌로 덮는 것으로, 호남 영남지방에 많고 중부지방에도 다수 있으나 한강이남에서 주로 발견되 남방식으로도 부른다.
개석식 고인돌은 탁자식이나 바둑판식처럼 상석 아래의 지석이 없어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덮개들을 놓은 형식이다. 언뜻 보면 넓적바위나 둥근바위가 땅위에 놓여있는 모습으로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인공을 가한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개석식은 전국에서 발견된다.
많은 인원을 동원해야만 축조가 가능했으리라고 볼 때, 고인돌은 고대국가 발생 이전의 계급사회인,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족장사회의 공동묘지이며 세습신분사회까지도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