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제사 올리는 마을, 성석동 ‘진밭’

제 끝나면 신통한 우물물로 빚은 조라술 음복

2007-10-25     고양신문

공동의 복을 비는 일은 어느 마을이나 행해졌던 일이었으나 이제는 그조차도 희귀한 일이 돼 버렸다. 아파트들은 과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그 위용을 뽐내지만 일산신도시에서 10분만 벗어나면 아직까지 산신제를 지내는 마을이 있다. 해마다 2번씩 마을의 주산인 고봉산에서 산신제를 지내는 일산구 성석동. 올해는 양력 11월 12일(월) 해뜨기 전에 산제사를 올린다.


고양시 일산구 성석동. 현재 300가구 정도가 모여 마을 주산인 고봉산에 해마다 두 번, 음력 4월 3일, 음력 10월 3일 산제사를 지낸다.
성석동에서는 진밭, 오얏골, 벌말, 함못이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마을들이 한 마을처럼 지낸다. 성석동 토박이인 진밭두레보존회 신유희 회장은 “진밭이라 불리던 우리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함정 어 씨입니다. 그 이후로 풍산 홍 씨, 전주 이 씨가 마을에 들어왔고 나중에 밀양 박씨와 평산 신씨가 마을에 들어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집성촌은 아니지만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이 돈독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성석동에는 마을의 안녕을 바라는 ‘성석동 산신제’와 마을 민속놀이인 ‘진밭 두레패 놀이’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어 사람들을 하나의 유대감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진밭 두레패 놀이는 성석동 진밭마을 일대에서 행해지는 민속놀이로 모두 12마당놀이를 갖추고 있다.

부부생활, 제수비용 뒷말 삼가

산신제는 화주라고 부르는 세 명의 제관(祭官)을 선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들을 상화주, 중화주, 하화주라고 부르는데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상, 중, 하화주를 나누어 맡는다. 이들 세 명의 제관들은 제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준비와 진행을 맡아 진행한다. 제관은 마을에 사는 남자 중 부인이 건강한 사람만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제관이 되는 일은 명예로운 일로 여겨진다.
제관에 선출되면 부정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외출을 삼갔다. 지금은 많이 그 규율이 조금 너그러워졌으나 과거에는 제관은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아 산신제가 끝날 때까지 나무젓가락을 사용해 볼일을 해결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아직까지 남아 부부 생활을 금하고 산신제가 이루어지는 동안 제관은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한다.

산신제의 준비는 제관이 도맡아 하지만 그 비용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부담했다. 제관이 각 가호마다 제수에 쓰일 정성을 추렴한다. 옛날에는 잘사는 사람은 많이 내고 못 사는 사람은 조금 냈으나 현재는 각 가호마다 5000원 씩 일정액을 똑같이 나누어 분담한다. 제수비용에 대해 뒷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여전한 불문율이다. 76년 즈음에는 마을 답(畓)을 운용해 그 소출로 산신제를 올렸으나 정성이 부족하다 하여 각 가정마다 비용을 분담하는 지금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조라술은 제단 아래 우물물로 담아

일산 장날 제관이 나가서 장을 보면 본격적인 제수 준비가 시작된다. 제수로는 밤, 대추, 배, 대구포, 북어, 두부, 소족, 탕, 노구메, 조라술 등이 준비된다. 여기에 세 명의 제관중 상화주는 시루떡, 중화주는 인절미, 하화주는 골무떡을 따로 준비한다.
소족은 상화주의 집에서만 삶을 수 있도록 못박고 있다. 노구메는 놋쇠나 구리로 만든 작은 손으로 여기에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메(제삿밥)를 지어 준비한다. 조라술은 입 마개를 하고 장갑을 낀 상태에서 젓가락으로 흠이 없는 온전한 쌀을 골라내어 술을 담근다. 성석동 산신제에 사용하는 조라술에 사용되는 물은 산신을 모시는 제단 아래 위치한 우물물을 쓴다. 조라술은 산신제를 모시기 사흘 전에 제단 근처에 묻어두었다가 당일 날 사용한다.

화주들은 해뜨기 전에 제사터에 모여 두 차례의 제사를 미리 지내는데, 그 때에는 동네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다. 3번째 제사에 비로소 동네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다. 성석동 산신제는 세 명의 화주가 각각 상을 차려 제사를 지낸다. 세 가지 종류의 떡과 노구메 세 그릇에 탕 세 그릇을 놓고 탕 그릇 옆에는 통후추를 같이 올려놓는다. 메와 탕, 두부를 제외한 제수는 모두 제기를 사용하지 않고 흰 종이를 깔고 그 위에 그냥 올린다. 제상이 준비되면 독축(讀祝)이라 하여 축문을 읽는 것으로 산신제가 시작된다. 각 제관이 절을 하고 기원을 한 후, 종이를 태우는 과정인 소지를 끝으로 공식적인 제사가 끝난다. 축문은 입신출세와 경로효친, 마을의 태평성대와 마을의 화합과 번영을 기원하는 전통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제사가 끝난 이후에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산으로 올라와 조라술로 음복(飮福)을 한다.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음복은 복(福)을 마신다는 뜻으로, 신명이 흠향(歆饗)하였던 제물을 받아먹음으로써 그 복덕을 물려받는다는 의미를 갖는다. 음식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누어 먹어 남은 음식이 산밑으로 내려오는 일은 없다고 한다.


성석동 산신제에 얽힌 이야기

1. 반드시 한 해 2번 산제사를 올려야 하는 이유
88년 즈음, 봄과 가을에 드리던 산신제를 일년에 한번씩만 드린 적이 있다. 일년에 두 번씩 제를 모시는 것이 번거로워 한번을 생략하기로 한 것인데 이후에 마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 해에 걸쳐 마을 사람이 6명이나 죽은 것이다. 더욱 기이한 것이 죽은 마을 사람 6명 모두 특별한 사고나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으며 모두 건강하던 젊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2번씩 산제사를 지내게 됐다고 한다.

2. 사람 누운 형상 그대로 ‘장사바위’
지금은 없어져 자취를 감췄지만 성석동 산신제를 모시는 고봉산 자락에는 ‘문방절’이라는 작은 절이 하나 있었다. 그 근처에는 약수가 나오는 터가 하나 있었고 약수를 마시기 위해 이곳에 자주 나타나는 이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큰 바위에 누웠더니 그곳에 사람 모양의 형상이 찍혔다고 한다. 후에 사람들은 이 바위를 ‘장사바위’라고 부른다.

3. 산신제단 밑 마르지 않는 약수터
성석동 산신제를 모시는 제단 아래에는 조그만 약수터가 있다. 이곳의 약수는 그 맛이 달기로 유명하다. 산신제에 사용하는 조라술도 이곳의 물을 사용해 만든다. 이 물을 사용해 조라술을 담가 땅에 묻으면 3일 만에도 깊은 맛이 난다고. 한다. 또 이곳의 물은 아무리 날씨가 가물어도 단 한번도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