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 사는 원흥동 솔개마을

올해 초 마지막 산치성 올려 … 우물도 신성시

2007-11-09     김한담 기자

삼송신도시 개발을 앞둔 속해있는 원흥동은 신원동과 함께 마을신앙이 지금까지 전승되어 온 지역이다. 원흥동 솔개마을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산신제와 도당굿을 지낸 장순진 씨와 임순형 씨를 통해 이 마을의 산신제를, 삶의 채취와 함께 풀어본다.

경기 북부지역의 마을신앙에서는 무엇보다 산신이나 도당같은 신격이 마을주신으로 자리잡은 경우가 많고 모셔지고 있는 도당신격은 산신계열이 많다. 도당신 계열도 도당천신이라 하여 천신계열에 속하는 것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산신신앙의 계보에 속해있다. 그래서 도당신은 대개가 마을 안산이나 진산에 속하는 산에 신당이 모셔지고 도당할아버지나 도당할머니 등의 신격이 주신으로 봉안돼 신격화되고 있는 사례가 자주 나타난다.

경기북부에서는 보편적으로 산신제를 지내는 가운데 도당굿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도당굿은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산신제만 지내다가 격년, 혹은 3년에 한번씩 도당굿을 지낸다. 산신제는 밀의(密議)로서 엄숙하게 유교식으로 지내는 경우가 많고 도당굿은 무당이 참가하여 마을축제 형식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다수다. 산신이 윗당이라면 도당은 아랫당인 경우가 많은데 마을에 따라서는 산신과 도당이 합쳐져서 1개의 당만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경기북부 지역의 산신제와 마을굿은 남부지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전승되어 온 마을 수가 적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휴전 접경지역이 대거 군사지역으로 묶이면서 당산, 국사당 등의 산정이 출입금지구역으로 묶인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일찍부터 기독교와 천주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마을신앙 자체가 소멸된 지역도 다수이며 도시개발로 인한 외지인의 절대적인 증가도 마을 해체의 한 원인이었다.
삼송신도시 개발지역에 속해있는 원흥동 솔개마을은 서삼릉 진입로 입구에 위치한 마을로 왕릉 관리를 위한 마을 형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에도 송현동 능길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 길은 조선조 중기 이후 중종의 계비인 정경왕후의 능이 생기고부터 참배를 위해 길을 단장하고 신성시 해오다가 40년 전에는 이 자리에 김구 선생의 묘가 자리잡게 된다고 하여 다시 길을 넓혔다. 그러나 무산되어 버리고 지금은 골프장과 농협전문대가 대신 들어서고 다시 아스팔트 포장도로 바뀌게 되었다. 흔히 서삼릉으로 이르는 길이라는 뜻으로 능길이라 한다. <고양시 지명유래집 113~114쪽>

음력 9월 9일로 옮겨 산치성

원흥1리의 산신제를 살펴보면 축동이라고 부르는 마을 입구에서 약 50여m쯤 마을로 들어서면 왼편에 커다란 교회가 마을 안산 허리에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소롯길을 사이에 두고 능선에 신당이 자리하고 있다. 둘레가 약 20여m 쯤 되는 공터가 있는데 여기가 산신제를 지내는 신당이다.
예전에는 10여 그루의 노송이 있어 신당으로서 그 면모를 자랑하였겠지만 십수 년 전부터 한 그루씩 말라죽어 지금은 죽은 소나무 그루터기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20년 전까지는 매년 음력 삼월삼짇날 산신제를 지냈는데 이 시기가 워낙 바쁜 농사철과 겹쳐 지금은 음력 9월 9일로 날짜를 정해놓고 제를 지냈다.

이 마을의 산신제는 경기북부지역 마을의 산신제와 비슷한 형식으로 예전에는 유교식으로 남자들만 참여해서 당주 3명이 제를 주관했으나 급격한 세상의 변화로 마을 남자들은 대부분 생업에 쫓기게 돼 차츰 아녀자들이 주관하는 것으로 바뀌어 도당굿과의 경계선이 허물어진 상태다.
제의과정을 보면 관내 고봉동 진밭마을의 산제사, 신원동 한우물, 원신동 능골의 산신제와 유사한데 제일 전 3일 동안 새벽마다 각 가정을 돌아다니면서 형편에 맞게 쌀이나 돈으로 제례비용을 추렴하고 제관이나 축관은 없이 당주 3인을 추천하여 상당주, 중당주, 하당주라 칭하고 이들이 제를 주관하였다.

제물로는 소머리와 시루째 올리는 떡, 조라술, 건어물(홍합, 해삼), 밤, 대추, 배, 두부 등이 있는데 이 동네에서는 특이하게 숭어를 올렸다고 한다. 또한 떡은 세 말씩 세 개의 시루에 나누어 쪄서 한꺼번에 제상에 올리고 이후 각각 마을입구와 우물에 하나씩 진설하였다고 한다. 조라술은 산치성을 드리기 이틀 전에 세 명의 당주가 산신당에 올라가서 조라술을 묻어두었다가 제일에 걸러서 세 병을 만들어 상에 올린다.

일주일 전부터 우물 청소하고 성역화

제사는 밤 12시쯤에 시작하는데 하얀 종이를 상위에 깔고 제물을 진설한 다음 상당주부터

차례로 하당주까지 참여한 마을 사람들과 같이 절을 하는 약식으로 변화되어 치러지고 있다. 새벽녘쯤 산제사가 끝나면 산제에 참여한 남정네들이 마을을 향해 “떡 받아가세요”라고 외치면 이때부터 아녀자와 어린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와서 음복도 하고 제를 지낸 음식물을 나누어 받아가곤 했다.
또한 산신제 기간 동안에는 금기사항이 있는데 당주로 선출되는 첫째 조건이 집안의 아녀자가 달거리를 하면 제외되고, 당주로 선출되면 농사일은 물론이고 마을 구성원 누구하고도 함부로 말을 나눌 수도 없었으며 엄숙하게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있어야 했다. 제일(祭日) 일주일 전부터 마을의 우물을 매일 청소하고, 마을에 들어선 사람은 마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며 외지로 나간 사람들도 들어 올 수 없는 심리적인 금줄을 마을 경계선인 축동(지명)에 설치했다. 또한 마을 구성원의 축하 행사일인 생일이 이 기간에 있으면 육류는 물론이고 인근 도랑에서조차 물고기 한 마리 잡을 수 없어 이 기간에 태어난 아이나 어른들은 생일상을 받을 수 없었다.

마을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윗 우물이 비교적 수량도 풍부하고 일정한 수온을 유지하고 있고 약 60여 호에 이르는 마을 주민들의 식수를 해결할 수 있어 예전부터 신성시해 왔는데 산제사 당일이 되면 마을 입구인 축동과 우물, 그리고 산신당에 올리는 떡을 각각 세말씩 시루에 쪄서 나눠 놓았다. 현재 마을 가보면 마을 입구 축동의 수구막이가 많이 훼손돼 예전 마을 건립 시 풍수적 비보 개념이 손상돼 있지만 그 의미는 지금도 충실히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웃우물의 경우 아래 우물보다 더욱 신성시하고 관리했으며 각기 다양한 우물에 얽힌 추억을 안고 있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