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즐거움은 한가한 삶에"
초가서당에서 고양의 큰 스승으로 거듭난 ‘팔여거사’ 김정국
김정국은 조선 중종기의 문신으로 호는 사재(思齋), 팔여거사(八餘居士)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부친의 벗 조유형(趙有亨)에게 의탁해 양육됐으며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조광조(趙光祖), 이장곤(李長坤) 등과 교류했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와 진사시의 양시(兩試)에 오르고 150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 후 사간원간, 군기시부정, 성균관사성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고 1518년 직제학에 제수됐다가 그 해 승정원동부승지로 승진해 왕명을 출납했다.
황해도관찰사로 재임 중인 1519년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해 <경민편(警民編)>을 편찬하는 등 지방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으며, 조광조(造光祖)를 비롯한 사림파의 향약장려운동에 호응해 향약의 보급을 통한 향촌 교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다음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등 사림파 학자들의 무고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했으나 사태가 급박해 상소를 중지했다. 후에 이러한 일들이 대간에 알려져 조광조 등의 사림파를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형인 안국(安國)과 함께 관직이 삭탈되자 그 후 고양군 중면 망동리로 내려가 초가로 엮은 작은 정자를 지어 은휴정이라 이름하고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김정국은 은휴정에서 시를 읊으며 스스로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했는데 ‘팔여’의 뜻을 풀이해 “토란국과 보리밥은 배부르고도 남음이 있고, 부들자리와 따스한 온돌은 누워도 남음이 있고, 샘솟는 땅의 맑은 물은 마셔도 남음이 있고, 봄꽃과 가을 달빛은 완상해도 남음이 있고, 새소리와 솔바람소리는 들어도 남음이 있고, 눈 속의 매화와 서리맞은 국화는 냄새를 맡아도 남음이 있고, 이 일곱 가지를 취해 즐김에 남은 즐거움이 있다”고 했다. 그가 망동리에 살 즈음 인근 마을의 진사 변호(邊灝)가 편지를 보내 무료함을 위로했는데 곧바로 다음과 시로 답장을 보내 은일함을 자랑했다.
내 밭이 비록 넓지 않으나
한 끼 배부름에는 남음이 있다네.
내 집이 비록 좁고 누추하지만
이 한 몸 항상 편안하다네.
창가에 아침 햇살이 오르니
베개에 기대 옛 책을 읽는다네.
술이 있어 내가 따라 마시니
궁달도 나를 어쩌지 못한다네.
내게 무료하다고 하지 말게
진실한 즐거움은 한가한 삶에 있는 거라네.
-사재집
<천명도설> 정지운, 기대승의 스승
김정국은 망동리에 살면서 직접 농사를 지어 농부의 고단한 삶을 체감할 수 있었다. 또한 고위 관리로 높은 벼슬을 지냈다고 고고한 척하지도 않아서 인근 주민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김정국이 망동리 은휴정에 물러나 있자 인근 지역의 많은 유생들이 그에게 수학하러 왔다. 이에 초가 서당을 짓고 ‘육무당(六(務堂)’이라 이름했는데 <사재집> ‘육무당기’에 그 의미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뜻을 세우는 일은 독실함과 원대함에 힘쓰고 부박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책을 읽는 일은 근실함과 꾸준한 노력에 힘쓰고 나태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학문을 하는 일은 깊이 연찬하고 체화해 방만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마음을 잡는 일은 공정함과 관대함에 힘쓰고 편벽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처신함에 있어서는 몸과 마음을 단속하는 일에 힘쓰고 방자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담론은 문학과 행실에 힘쓰고 용렬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유자들이 힘써야 할 것이 이 여섯 가지에 그치지 않지만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돌아가 여러 사람들과 이에 대해 추구해 얻음이 있기를 바란다”고 육무당의 의미를 직접 지은 기문에 기록하고 있다.
김정국이 육무당에서 양성한 제자 중에는 유충량 외에도 누이의 사위인 유용겸과 추만 정지운, 박형 등이 있다. 특히 <천명도설>을 지은 정지운은 훗날 뛰어난 산림의 학자로 성장하게 된다. 기대승이 쓴 <정추만천명도설서>에 따르면 김정국이 고봉의 망동에 복거할 때 기대승이 같은 마을에 살아 그 문하에서 함께 배웠다고도 하니, 기대승 역시 김정국의 문하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탐관오리 파직하고 청백리는 포상
김정국은 20여 년의 오랜 세월을 망동에서 보낸 후, 1538년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올라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미 황해도 관찰사로서 목민관의 임무를 탁월하게 수행한 바가 있었고 전라도에서도 목민관으로서의 그의 업적은 매우 뛰어났다.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 중 수십 조에 달하는 편민거폐(便民去弊)의 정책을 건의해 국정에 반영하게 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33년 10월 7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지금 전라도 관찰사 김정국의 서장(書狀)을 보니, 전주 부윤(全州府尹) 윤희인은 탐관오리이니 파출하고 낙안 현령 송익경은 청렴하니 포상하라 했으니, 권선징악을 잘 보여준 것이다. 요사이 감사(監司)들이 수령들의 범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혐의의 자취를 피하려 해 출척(黜陟)의 제도를 봉행하지 않기 때문에 수령들이 법을 범하는 사람이 많다. 이번에 정국이 사혐(私嫌)을 돌아보지 않고 전주 부윤의 탐오한 실상을 파헤쳐 파직케 했으니 이는 참으로 가상한 일이다. 이 뜻을 정국에게 유시하라.” 사신은 논한다. 지난번 간신배들이 조정에 있어서 탐욕의 풍조가 크게 성행해 조금도 기탄 없이 팔도에서 수탈을 자행했다. 수령된 자는 제 뱃속만 채울 줄 알고 백성들의 고통을 구휼하지 않으며 날로 착취만을 일삼고 권력자에게 아부했다. 무사(武士)와 남행(南行)만 그러할 뿐 아니라 유식한 문관(文官)도 휩쓸려 세속을 따라가고, 방백(方伯)이 된 자는 출척하는 권한을 잡고 있으면서도 자유롭게 처리하지 못해 그 폐단이 고질이 됐다. 그런데 정국이 탁월하게 장계(狀啓)를 올리니, 위에서만 가상하다 칭찬할 뿐 아니라 조야(朝野)의 식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다. 그가 유속(流俗)에 물들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가 살던 망동 이산포 인근 추정
이렇게 다시 조정에 중용되자 한번 망동리를 떠난 뒤로는 다시 찾을 겨를이 없어 산수간에 사는 일은 꿈에 그치고 말았다. 망동을 떠난 뒤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재척언>에는 그의 꿈이 실려 있다.
‘날아갈 듯 웅걸찬 누각에 울긋불긋한 단청빛이 빛나는데 헌창(軒窓)이 사방에 열려 있고 붉은 촛불은 휘황찬란하다. 곱게 얼굴을 단장한 여인들이 앞뒤에서 옹위하는데 좋은 손님이 자리에 가득하고 호걸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잔치자리에서 즐기니 음악소리가 구름에 닿을 듯하다. 이럴 때에는 마땅히 강장손으로 하여금 붉은 적삼에 푸른 소매의 옷을 입고 고운 얼굴 불그스름한 채로 가운데서 빠른 곡조에 맞추어 즐겁게 거문고를 타게 하니, 높고 낮은 가락이 울려 퍼져 들보와 지붕을 들썩거리게 한다. 그 곁에 귀공자의 정신이 취향(醉鄕)을 찾아가다 만취해 휘청거려 옥으로 만든 산이 무너지듯 무너지면, 미인의 무릎에 발을 걸치고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이를 듣는다.
푸른 벼랑 끊어진 절벽 사방으로 파란빛이 에워싸 있는데 맑은 샘물이 흰 바위 위로 굽이굽이 꺾여 흐른다. 소나무와 삼나무가 뻗어 있고 흰 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기이한 화초들이 샘과 바위 사이에 마구잡이로 돋아난다. 그늘 속의 새들이 노래하는데 개울에서 불어온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이럴 때에는 마땅히 김종손으로 하여금 소요관(逍遙冠)을 쓰고 학창의(鶴?衣)를 입게 한 다음 유수곡(流水曲)을 연주하게 한다. 소리가 유장하게 퍼지면, 곁의 은일군자가 손에 황정경(黃庭經)을 들고 발은 맑은 샘물에 담근 채, 돌을 베고 누워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이를 듣는다’.
김정국은 기생을 끼고 풍류를 즐기는 일과 깊은 산에서 은거하면서 성정을 다스리는 일, 이 두 가지를 모두 꿈꾸었다. 귀공자와 은일군자라는 서로 다른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의 무덤은 장단 동쪽 예전 임진현 관아가 있던 백목곡(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 123)에 있다. 이곳은 스승인 조유형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림의 선배인 남효온과 제자 정지운, 기묘명현인 기준이 인근 고양 땅에 묻혔으니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그가 살던 망동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한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산 이산포 인근인 듯하다. 숙종14년(1688) 세워진 문봉서원만이 그가 고양에 살았음을 증명해 줄 뿐이다. 문봉서원에는 김정국과 함께 남효온, 기준, 민순, 홍이상, 이신의, 이유겸, 그리고 제자였던 정지운 등을 제향했다. 문봉서원은 고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서원이지만, 대원군 때 훼철되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 김정국의 자취 역시 찾을 길이 없다.
/취재·사진 김한담 전문기자(전통예술문화원 하누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