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너희 나라 땅이야?”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2002-01-12     장석봉
작년 마지막 날이었다. 친구를 만나려고 마을 버스를 타고 가던 길이었다. 눈이 많이 내려서 차들은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었다. 버스는 가다서다를 반복했고, 버스 기사 아저씨도 아마 많이 짜증이 나 있었을 것이다.

그때 버스 앞좌석 기사 아저씨 바로 옆에 앉은 사람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고, 낯선 소리가 들렸다. 무척이나 생소한 말이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무척이나 반가운 전화인 것 같았다. 연말을 맞아 친구가 안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통화가 끝나자마자, 기사 아저씨가 하는 말은 이랬다.
“한국에서는 한국말 써야지. 여기가 너희 나라 땅이야? 너희 나라 말은 너희 나라에서나 하는 거지, 안 그래?” 분명 반말이었다. 물론 휴대폰의 주인이었던 그 청년의 목소리가 조금 컸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명 지나친 말이었다.

그런데 나를 더 당혹하게 했던 것은 이 땅에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인 듯한 그 청년의 대답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공손한 말투였다. 하지만 왠지 주눅이 잔뜩 들어 보였다.

남의 나라에 왔으면 그 나라 말을 써야지, 자기 나라 말을 쓴다고? 그렇다면 기사 아저씨는 파키스탄에 가면 파키스탄 말만 쓸 건가? 그저 점잖게 이렇게 타일렀어야 했다.
“버스 안에서는 큰 소리로 통화하면 안됩니다.”

기사 분의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너희 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지저분하냐?”
“니네 나라 사람들은 목욕은 하고 사니?”
물론 반말의 연속이었고, 청년은 억지 웃음을 머금으며 서투른 우리말로 매번 대꾸를 해 주었다.

연초에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란 책을 읽으며, 마을 버스에 탔던 그 청년이 이 땅에서 받았을 모욕감을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작정 반말부터 내뱉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사는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이다. 그 대단한 나라에 사는 내 자신이 슬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