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를 품에 안고 걸어보니
윤주한 /본지 편집위원
시대의 거인 전대통령 노무현님은 육신을 벗어 버리고 자연의 한조각인 한줌의 재가 되었다. 무거운 슬픔을 뒤로 하고 걸었다. 북한산에서 호수공원까지 언 60십리 길을 서로 손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걸었다. 초여름의 산들바람이 창릉천변의 짙푸른 초목에 부딪쳐 더욱 싱그러워서 서러웠다. 90십 노인에서부터 어린이까지 남녀노소 모두 한데 어울려 어떤 형식에 구애됨 없이 풀어져 긴 꼬리를 이었다. 천연기념물인 원앙도 만났고, 흑오리떼 백로도 함께 했다.
걷기행사의 기획을 듣고 뭐 재미있는 일이냐고 시큰둥했었다. 수많은 걷기 행사가 있는데 웬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참여하나 의아해 했었다. 편견이었다. 막상 참여해보니 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행사인지 미쳐 깨달지 못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양의 일번지 최고봉 북한산에서 인공적이지만 고양의 상징이 된 호수공원까지의 종주는 고양사랑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첫걸음, 은평뉴타운 단지 옆 창릉천을 지나간다. 굽이치는 물줄기를 직선화하고 폭을 줄이는 수직축대를 세우는 무모함을 바라보며 너무 아팠다. 지축삼송개발지 창릉천을 내려오면 널부러진 쓰레기 더미와 짙푸른 수변의 극명한 대비는 생태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원흥동 도내동 자연마을길을 접어들며 한층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아늑함도 잠시, 이 지역 또한 보금자리 주택건설이라는 미명하에 아파트 숲으로 변한다고 한다. 화정신도시를 거쳐 대장동을 넘어 일산신도시로 향한다. 어느새 모심기를 끝냈는지 논에는 제법 푸른 기운이 완연하다. 이놈들이 자라서 듬뿍 산소를 공급해주겠지. 도농이 한데 어울려서 아기자기 살만한 도시로 만들어야 하는데 행정타운으로 그곳이 계획 중이라던가 한숨이 나온다.
사랑과 분노함을 접고 안으로 한번 보자. 베트남의 성자 틱낙한 스님은 걷기에 모든 진리와 수행이 다 있다고 했나 보다. 걷기는 우리가 나면서 기기를 극복한 이후 몸져눕기 전까지는 걸을 수밖에 없는 지극히 자연적인 동작이다. 의식해서 할 수 없는 생존하기 위한 노동이며 숙명적인 활동이리라. 그런데 거기에 진리가 있다니.
한번 수행자들이 선수행 하듯이 걸어보자 마음먹었다. 일자 걸음으로 계속 걸어보아야지 다짐한다. 하지만 어느새 그렇게 걷자고 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팔자걸음을 걷고 있다. 아 오만가지 생각들로 그 단순한 일자걸음을 통제하지 못하고 흩트리고 마는구나. 수행은 전일(專一)하게 오로지 한 생각을 집중해 모든 번뇌를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불가에선 한가지 화두로 다른 생각을 쫒아버리는 것이 아닐는지. 또한번 시도를 해본다. 조금 길게 일자걸음을 걷을 수 있었고, 한발 한발이 재미있고 옆 사람과 이야기도 잊고 그저만사를 잊고 자연을 그림 보듯 스치며 나만의 내면의 즐거움이 쏟아졌다. 이렇게 일자 걸음 일자 걸음을 되내기면서, 근육의 아픔도 잊고 그런 자리에서 그렇게 지나가는 구나. 기도하듯이 정좌하듯이 가부좌를 틀고 참선하듯이.
생명 나눔 오체투지단의 순례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벌레가 기듯 일어섰다 구부러지며 자벌레처럼 한땀 한땀 이어가는 행위는 무엇이란 말인가. 누구에게 시위하듯이 항거하는 행위는 아닐 것이다. 철저한 자기반성이며 고된 수행의 길일 것이다. 지금 이 사회를 꽁꽁 묶어놓은 이기심과 불의를 넘고자하는 나부터의 참회이며 자신과의 싸움일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본질적인 것을 향해 시선을 안으로 거두는 시간일 것이다. 그렇게 의미를 갖고 걸어보자 했다 건방지게. 거룩한 고행 행렬과 편안하고 즐거운 걷기행사와 동일하게 보는 무례함이 송구스럽다. 하지만 대여섯 시간의 행보가 무거운 마음을 털고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시간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어제 님을 보내면 슬피 울었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가슴 깊이 저며 오는 걷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