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만나다-일산신도시 집중 인터뷰

2009-07-30     고양신문
마두1동 곽덕녀 부녀회장

교육도시가 정답…쾌적함 떨어져 걱정

“1993년 입주할 때는 아침에 창문을 열면 정말 상쾌했다. 지금도 환경이 좋지만 그 때 만큼은 아니다.”

곽덕녀 마두1동 부녀회장은 일산이 초기에 비해서는 난개발도 많아지고 쾌적함이 떨어져 신도시의 의미가 축소되고 있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곽 회장은 또 일산이 공부할 여건도 괜찮은데 대학이 없는 점이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산은 원주민들이 남아 있어서 다른 신도시보다 삭막함이 덜하다. 또한 각종 단체 활동 등을 통해 이웃들이 서로 교류하고 있다.”

곽 회장은 일산에는 다른 신도시와 달리 경의선과 지하철 3호선 두 개의 노선이 있고, 호수공원과 라페스타가 있어 여가 생활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일산은 교육도시를 지향해야 한다. 자녀들이 대학을 진학 할 때면 다른 곳으로 가야하지 않느냐.”

마두1동 구숙회
체육회장

본일산 친구추천 1993년 입주

구숙회 마두1동 체육회장은 일산 신도시 개발 전에도 일산에 종종 들리곤 했다. 본 일산에 친구가 살았기 때문이다. 일산에 신도시가 형성되자 1993년 입주를 하게 된다. 구 회장은 일산을 강남, 분당과 비교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교하려면 이사를 가라고 말한다. 구 회장은 자녀들을 모두 일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일산에서 애정을 갖는 장소는 정발산과 호수공원이다.

“정발산 도당굿을 보다보면 지역의 옛 정서를 읽을 수 있어 정겹다. 타지에 사는 친구들에게는 호수공원에 놀러오라고 자랑한다.”

구 회장은 주민자치위원회, 체육회, 봉사단체 등을 통해 지역 주민들과 교류한다. “손자손녀들도 일산에서 키우고 싶은데 대학이 없는 것이 불편하다. 교육도시로 발전해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장성마을 김건호씨

이웃만 잃고, 얻은 건 “없다” 

장성마을에서 “집하나 달랑” 가지고 있던 김건호씨(68세)는 당시 보상받은 택지를 팔았다. 그돈으로 구일산에서 살다가 최근 대화마을로 옮겨왔다. 개발로 이웃을 잃었고 얻은 것은 “없다.” 

그때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이야기하며 김씨의 눈시울이 불거진다. 동네 형, 아저씨와 만나 술한잔하며 모두가 이웃사촌이던 시절을. 옛 이웃들과는 지속적으로 만나지만 현재 이웃들과는 그렇지 못하다. 장성공원에서 장성회 사람들 만나는 게 요즘은 유일한 낙이다. 신도시 공간중에는 킨텍스가 가장 자랑스럽다. 아쉬움이 많지만 그래도 일산이 제일 살기 좋은 곳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장성마을 김근배씨

대화역 자리에 움집 짓고…
 
김근배씨(69세)는 일산시 법곳동에서 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김씨는 1951년 1·4후퇴 때, 북쪽 고향인 장단마을을 떠나 현재 대화역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당시 그 곳은 장성마을 이라고 불렀는데, 장성은 북한에 살던 장단마을 사람들이 피난 와서 새롭게 만든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근배씨(69세)는 일산시 법곳동에서 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김씨는 1951년 1·4후퇴 때, 북쪽 고향인 장단마을을 떠나 현재 대화역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당시 그 곳은 장성마을 이라고 불렀는데, 장성은 북한에 살던 장단마을 사람들이 피난 와서 새롭게 만든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김근배씨(69세)는 일산시 법곳동에서 배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김씨는 1951년 1·4후퇴 때, 북쪽 고향인 장단마을을 떠나 현재 대화역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당시 그 곳은 장성마을 이라고 불렀는데, 장성은 북한에 살던 장단마을 사람들이 피난 와서 새롭게 만든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1살에 가족과 함께 내려와 처음에는 잠잘 곳도 없었어. 땅을 파서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천막을 두른 움집에서 살았지. 세 네 평 정도나 될까? 그 때는 이불 하나로 7~8식구가 덮고 잤어.”

김씨는 그래도 농사 짓고 또 고양시에서 공무원생활을 하면서 생활이 점점 나아졌다고 한다. 김씨는 “이곳은 내 두 번째 고향이야. 일산이 사람살기 좋은 생활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대화동 김선자씨
(적십자 봉사회 회장)

일산은 내겐 행복한 기회도시

고향인 대전에서 30년 살았다. 남편의 사업으로 98년 옮겨온 일산은 처음엔 황량했다. 지금은 “고향생각이 안날 만큼” 일산이 좋다는 김선자씨(39세)는 대화동 주민자치위원회 위원, 적십자 봉사회 회장, 장성중학교 운영위원회 위원장 등 활발한 지역활동을 하고 있다.

중3,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둘인 김씨는 환경문제를 가장 많이 고려했다. 지금도 쾌적한 환경이 가장 만족이다. 주민자치센터, 학교에서 이웃들과 만난다. 얼마전부터는 탄현동에 IT관련 회사를 운영하는 여성 기업인이기도 한 김씨는 당연히 일산이 경제도시로 발전했으면 한다.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는 김씨에게 일산은 모든 것이 갖춰진 행복도시다.

대화동 김정규씨

개발된다니 걱정만 많이 했지

일산시 대화동에 사는 김정규씨(63세)는 현재 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김씨는 6·25 전쟁 때 북쪽 고향을 떠나 일산에서 계속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이 변화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고 한다.

“일산 신도시 개발이 발표 되었을 때 처음에는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없었어. 왜냐하면 개발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니까. 향후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지에 대해 불안하기도 했고.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일산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생활이 훨씬 나아졌지. 이전에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할 수가 없었는데 개발이 되면서 사업장이 늘어났고, 더불어 일자리도 늘어났지.” 라면서 일산 신도시 개발에 대해 만족해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정들었던 이웃사람들과 헤어져야 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세대야. 나는 일산이 교육도시로 발전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우리 후손들이 좀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정발마을 박복남
(백마초교 총동문회장)

“고향 떠나니 당시엔 당연 반대”

신도시 개발이전 강촌부락에 살았던 박복남 백마초교 총동문회장(57세)은 현재 정발산 단독주택지에 살고 있다. 당시에는 개발에 “고향을 떠난다는 것만으로 무조건 반대”였다. 개발 당시 보상에는 “주위보다 더 주니까 그저 그런가보다”했다. 당시엔 정부 수용이라면 거저 빼앗던 시절이니.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이웃과의 끈끈한 정이 사라졌고, 대신 경제적인 편리를 얻었다고.

박 회장은 백마초동문회, 주민자치위, 강촌향우회 등 함께 하는 단체가 많고, 동네 새 이웃들과도 잘지내는 편이다. 고양시가 더 이상은 개발하지 말고 녹지축으로 남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교육문제 우선 고려후 이사

서울에서 살다가 일산신도시 개발 이후 “환경이 좋아” 이사온 서정복씨(47세)는 남편, 아들 둘과 풍림아파트에 살고 있다. 이사오면서 단연 교육문제를 중요하게 고려했다. 우연히 반장을 맡게 됐다가 지역일에 참여하게 됐다.

“봉사하며 사는 뿌듯함을 느끼게 됐죠. 일산은 앞으로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도시라고 생각해요.”
문화센터, 주민자치센터에서 이웃과 만나고 할 일이 있는 일산이 좋다고. 처음보다 교통여건이 나빠지는 점은 좀 걱정스럽다. 그래도 얘기가 나오고 있는 명품신도시나 인근 지역개발에 기대가 높다. 일산과 대화동의 가치아 높아질 것이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백석2동 설영식
주민자치위원장

13년 살아 고향같은 일산 

설영식 백석 2동 주민자치위원장은 1996년에 일산에 처음 와보게 된다. 서울보다 공기도 좋고, 나무도 많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백석 2동에 주택을 짓고 13년 간 한 번도 떠나본 일이 없다.

설영식 백석 2동 주민자치위원장은 1996년에 일산에 처음 와보게 된다. 서울보다 공기도 좋고, 나무도 많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백석 2동에 주택을 짓고 13년 간 한 번도 떠나본 일이 없다.

“지금도 환경을 생각하면 이사오기를 잘 했구나 싶어요. 분당과 비교해 봐도 모든 것이 계획적이고 조화롭게 잘 구성돼 있어요. 일산이 이제는 고향 같지요.”

지금은 고향처럼 느껴지지만 이주 초기만 해도 이웃과의 교류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주민자치위원회 등 지역 활동을 하면서 일산에 정을 붙일 수 있었다고 한다.

“친목회나 주민자치위원회 등 지역 활동을 하다보니 지역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이웃과 화합하고 지역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는 과정이 소중하게 느껴지더군요.”

설영식 위원장은 일산에 호수공원이 있는 것이 가장 큰 자부심이란다. “일산이 모든 분야에서 시민들에게 만족스러운 도시가 되길 바란다.”

백마마을 이규환
마두2동장

밀레의 만종처럼 그림같았는데

이규환 마두2동장(58세)은 산황리에 살았다. 고양군 산업과 농어촌개발과에서 일할 때 신도시 개발 발표가 났다. “우리가 주무부서니 맨날 밤을 샜지요. 90년에 수해가 나서 또 밤새고.”

일산신도시 개발 당시를 회상하는 이규환 동장의 얼굴이 상기된다. 일복이 얼마나 많았는지. 대토를 위해 정발산에서 흙을 가져오기로 했는데 돌이 나와서 부랴부랴 중산을 개발하게 됐다. 그래서 중산탄현지구가 개발될 수 있었다. 보상엔 만족한다고. 당시 지가 3만원 미만이었는데 보상은 농지가 평당 9만원, 대지는 20만원이상 이었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당시가 그립다. “가을에 철길에 코스모스가 휘날리고, 논바닥에 참게 주워담고. 그때 백신마을 풍경은 밀레의 만종이 생각난다.”
지금 살고 있는 강촌마을엔 이웃과의 만남이 쉽지가 않다고. 동네 행사도 치르기 어렵고 주민자치위원회 할 사람도 쉽게 구하기 어렵다. 그래도 일산은 이동장에겐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고향이다.

대화동 이상열
(주민자치위원장)

마구잡이식 개발은 “이제 그만”

새로 이사온 이주민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이상열 대화동 주민자치위원장(54세)은 남은 아니다. 파주 금촌 출신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백마초등학교 출신의 토박이. 토박이들의 아쉬움과 정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파주에서 일산으로 넘어온 이유는 교육. 문화적인 여건에 만족한다.

구산동, 고봉동같은 외곽지역에 가면 옛날의 그리움이 살아난다. 1996년 백석동으로 왔다가 다시 대화동으로 옮겨왔다. 가족과 아들둘이 살고 있다. 장항동에는 운영하는 회사가 있다. 일과 생활이 만나는 공간이 바로 일산이다.

대화동 주민자치위원장, 고양법원 조정위원, 금촌로타리, 파주평화통일위 자문위원 등 활발한 지역 활동을 고양과 파주를 넘나들며 하고 있다. 일산이 살기는 좋지만 교육문제등으로 주기적으로 사람들이 떠나는 게 아쉽다는 이씨는 “계속된 개발로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건 좋지만 환경, 공해부담을 감수해야한다”며  “더 이상의 마구잡이식 개발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마두1동 이성이
(주민자치위원회 총무)

신도시 중 녹지비율 높아 입주

이성이 마두 1동 주민자치위원회 총무는 신도시에 입주하면서 1기 신도시들의 녹지비율을 살펴보고 일산으로의 입주를 결정했다. 다른 도시에 비해 일산의 녹지비율이 높은 것이 마음에 들어 1995년에 입주를 하게 됐다.

“입주 초기에 기차가 지나가면서 경적소리를 냈는데 그게 참 정겨웠다. 지금도 재래시장에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하는데 그게 신도시를 살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재미다.”

이성이 총무는 특히 애니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애니골에서 친구, 이웃들과 함께했던 추억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한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지금 사는 아파트의 이웃들과 정이 들어서 다른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도  생각 안 해요. 그런데 일산을 떠날 생각을 하겠어요? 안 하죠.”
그녀는 부녀회나 주민자치위원회를 통해 이웃들과 교류하는 활동이 즐겁다.    

대화동 이정선씨

“살기 힘들어도 그때가 좋았지”

“그때 토지공사에 같이 모여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나중에 택지 받아보니 다 떨어졌지 뭐야. 아쉽지.”

이정선씨(78세)는 현재 장성마을 옛 토박이들 중 활동하는 이들 중에는 최고 연장자다. 예전에는 정말 “일을 몹시 했는데도 간신히” 살았다. 지금은 윤택하고 편리하지만 사람사는 재미는 그전만 못하다고. 개발 당시 이웃들이 함께 살 수 있도록 뛰어다녔지만 결국은 다 흩어지고 말았다.

이정선씨는 유림회, 행주산성제전위원, 고양군지 편찬위원 등 지역일도 많이 했다. 고양시와 일산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다. 다른 도시보다 나무를 많이 심어 살기 좋다고. 교통문제 하나가 아쉽다.

파주로 자꾸 빼앗겨 아쉬워

당연히 반대였다. 그냥 그대로 사는게 좋지 뿔뿔이 흩어져 사는게 뭐가 좋겠는가. 송포면 대화리 장성마을 135번지가 주소였던 이충환씨(73세)는 장성회, 송산회에 소속돼있다. 예전에는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은 작게 임대업을 하고 있다.

옛 일산을 느끼는 공간은 대화동 장성공원. 일산이 살기좋다는데는 이견이 없지만 교통편이 너무 불편하다. 파주로만 좋은 걸 자꾸 빼앗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 1년에 한번 예전 장성마을 사람들이 모이고, 장성공원에서 자주 보긴 하지만 “떠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아쉽기만 하다”고.

백석2동 전순자
주민자치위원회 간사

“옛 정취 공존하는 일산 매력” 

“서울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다가 마두동으로 옮겼어요. 그런데 일산이 참 좋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집도 이사하고 1994년에 입주했죠.”

전순자 백석 2동 주민자치위원회 간사는 일산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많고, 공기나 환경이 좋아서 매력적이라고 밝혔다. 더구나 이웃 간의 우애가 입주 초기부터 형성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은 다른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강조했다.

“일산은 토박이 정서나 옛 정취가 있어서 더욱 풍요롭게 느껴져요. 더구나 백석 2동은 일산의 관문이라 자부심도 있고요.”

전순자 간사는 마두동에서 하던 체육관을 정리한 뒤에도 옛 회원들과 여전히 교류하고 있다. 또한 놀이방에서도, 주민자치위원회에서도 이웃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전 간사의 행복이다.

전순자 간사는 특히 백석 2동에는 주민자치위원회가 매년 10월이면 알미공원에서 마련하는 한마음 축제가 자랑이라고 강조했다. “일산이 문화도시로 성장하기를 바래요. 아람누리, 어울림 누리, 킨텍스 등의 시설을 잘 활용하면 문화도시로 성장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렇게까지 좋을줄 몰랐다

“그당시 땅값이라는 게 있었습니까. 2만원짜리 땅을 8~9만원 보상해줬으니 잘해줬지. 난 그때 3000만원에 택지 보상 받아 서울갔다가 백석동으로 들어왔죠.”

개발 당시 장성마을에 땅이 있었던 조기행씨(61세)는 보상이나 신도시개발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었다. 당시에도 찬성이었지만 해놓고 보니 “이렇게까지 좋을 줄 몰랐다”고.

당시에 서울시 기능직공무원있던 조씨는 상대적으로 개발에 대해 눈을 뜬 경우였다. 지금은 파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이웃과 만나는 공간은 주점이다. 예전처럼 이웃집을 방문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일산이 생산시설이 없는 점이 아쉽다. 자족도시가 되었으면 한다고.  
<특별인터뷰 - 김진이 박기범 윤영헌 이영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