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기억과 6월의 한

2001-05-28     이무열
올해도 5월은 어김없이 찾아와 옹색한 삶의 굴레에 매여 있는 우리를 다그친다. 너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우리의 5월을 이번에도 그냥 그렇게 깊은 땅 속에 묻어두고 보낼 거냐고?
아니, 실은 올해도 그냥 그렇게가 아니다. 넓게는 전국의 크고 작은 일터에서, 좁게는 이곳 고양시청 안에서까지도 민중들의 생존권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고, 그나마 풀려가는 것 같던 남북 관계마저도 미국 부시 정부 출범 이래 진통을 거듭하며 비비 꼬이고 있다. 민주주의와 민족자주로 압축되던 5월 정신이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내 눈이 잘못된 걸까?

아니다. 분명 아니다! 세상이 바뀌었느니, 시대가 변했느니 하는 씨알 없는 저들의 선전에 우리가 주책없이 끌려 다니는 사이에도, 제 뱃속을 조금이라도 더 채우려 하고, 혹 제 뱃속이 빌 경우에는 남의 창자를 도려내서라도 끝내 제 뱃속을 채우고야 마는 자본의 속성은 요지부동이고, 그 칼끝은 이제 우리의 심장을 겨눠오고 있다. 그리고, 안팎의 위기를 맞은 미국은 느닷없는 미사일 방어 체제로 위기를 돌파하고자 갖은 무리수를 두어가며 남북 화해 분위기에 제동을 걸고 있고, 큰형님의 심기를 잠시 거슬렀다가 호되게 당한 우리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알아서 기고 있다.

이러니, 민주주의니 민족자주니 민중생존권이 바로 설 리 만무하다. 전국 곳곳에서 우리도 밥먹고 살자고, 우리도 외세에 휘둘리지 말고 떳떳하게 살아보자고 수많은 사람들이 단식 행렬을 이어가도, 정부와 외눈박이 언론들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 희망이란 게 과연 남아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런 중에도 반가운 소식이 하나 있다. 지역의 몇몇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조촐하게나마 5.18 기념행사를 갖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광주, 전남에 국한되어 있던 5월 행사, 그나마 정신이 퇴색돼간다는 소리를 듣고 있던 5월 행사를 지역에서 되살려 보려는 취지라 한다. 출발은 비록 작지만 열매는 크기를 기대해본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6월이다. 6월이라고 불의한 정권에 대한 항쟁의 역사, 그 빛나는 6월 항쟁의 역사가 없을 리 없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이제 50년을 훌쩍 넘긴 6.25의 기억이 아닌가 싶다. 자주독립통일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민족의 열망을 짓이긴 전쟁, 이후의 한국 사회를 자유롭게 숨쉬기조차 힘든 극우 일색의 사회로 만들어버린 전쟁의 그늘은 아직까지도 짙고 깊다. 세계 최고의 반인권법으로 꼽히는 국가보안법이 아직까지도 엄존하고, 각양각색의 인권유린과 패권주의가 판치며, 자기 보신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뒤집힌 가치관이 지배하는 것 따위가 그 좋은 보기다.

더욱이 전쟁 후의 정권은 수백만 민간인 학살의 토대 위에 세워진 정권이었다. 역대 정권, 그리고 전쟁에 근원적인 책임이 있는 미국은 모든 수단을 다해서 학살을 은폐하려 했다. 그리고 긴 세월 동안 지엄한 공포 정치하에서 대학살의 역사는 용케도 은폐돼왔다. 그러나 진실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간간이 튀어나와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곤 했다. 최근에 와서는 거창과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되어 사건이 재조명되고 있고, 미군에 의한 노근리 학살은 국제적인 조명을 받으며 전국의 학살 지도를 다시 그리게 만들었다. 학살 사실이 밝혀진 곳만도 전국적으로 30여 곳, 문제가 제기된 지역은 이루 헤아리기 힘들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와 국회의 태도는 미지근하기 짝이 없다. 고양금정굴을 비롯해서 특별법 제정 청원이 정식 접수된 곳만도 7곳인데 아직 청원심사조차 하지 않고 있다.

고양시로 넘어오면 다시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모른다. 그래도 시장, 군수나 의회가 위령제에 참여하고 자체 조사에 나서는 등 문제 해결에 동참하려는 제스처라도 취하는 다른 지역들과 달리, 고양시는 아예 사건을 거론조차도 못하게 하려 들고, 심지어는 불법 학살을 인정한 경기도의회의 보고서조차도 인정 못하겠다는 투다. 시장은 묘역을 조성하고 위령탑 하나 세워주자는 최소한의 위령사업조차도 거부하고 있고, 시의회 역시 위령사업 촉구 청원을 뜨거운 감자로만 여기고 있다. 다시 한번 이 한국 사회, 이 고양시에 희망이 있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뿐이다.

그런 중에도 반가운 소식이 하나 있다. 각 지역의 청원을 소개한 국회의원들 10여 명이 모여 전국 통합입법을 추진키로 했다는 소식이다. 그리하여 곧 통합 특별법안 공청회가 열리고, 그를 토대로 법안을 보강하여 6월 임시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란다. 이제야 희생자와 유족들의 50년 맺힌 한이 풀릴 날이 오는 건지,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면서 힘을 실어줄 때다. 우리 사회에서 하루 빨리 학살의 역사가 끝나고 생명과 삶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