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어둠 속으로 떠나는 여행

시각장애체험공간 ‘센스 더 블랙(SENSE THE BLACK)’

2010-05-13     고양신문

비장애인 인식개선 공간…눈감고 자연 도심 카페 생활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산하 일산직업능력개발원(원장 김종상)은 중증시각장애인 전시공연직종 맞춤훈련 실습장인 '센스 더 블랙(SENSE THE BLACK)'을 운영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이 로드 마스터로 고용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공간인 센스 더 블랙은 비장애인들에게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한 체험공간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일산직업능력개발원은 사업주 및 사업체 임직원, 공무원, 학생, 지역사회 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연중 시각장애 체험을 진행하고 있으며, 2009년부터 현재까지 약 300여 명이 참가했다.

'센스 더 블랙'은 일산직업능력개발원 내 1층에 자연, 도심, 카페 등 3개의 테마관으로 구성돼 있다. 총 2시간의 시각장애 체험 프로그램 중 약 30분 동안 100%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길 안내자인 로드 마스터의 인도에 따라 청각과 촉각, 후각, 미각에 의지하며 일상에서 쉽게 지나쳤던 자연과 거리, 대중교통, 카페, 회의실 등을 어둠 속에서 경험해보는 참여형 체험관이다.

체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하얀 지팡이에 의존하며 눈을 감고 어둠 속 여행을 떠난다. 체험장 안에서는 눈을 떠도 눈을 감은 것처럼 아무것도 안 보인다. 완전히 빛이 차단된 공간이다. 한 번의 투어에 6명 이하의 소수인원이 참가한다. 어둠 속에서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 서로를 돕는 경험이 이 체험관의 매력이다.

▲ 시각장애 체험에 나선 이들 왼쪽부터 박찬식 대표, 김경덕 대표, 조광진 사무국장, 김일영 운영위원, 김지량 기자, 홍영옥 간사

빛이 없는 세상 속으로 출발
사람은 살아가기 위한 정보 대부분을 시각에서 얻는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센스 더 블랙(SENSE THE BLACK)'이라고 쓰여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를 기다리는 건 '칠흑 같은 어둠'이다(‘우리’는 이번 체험을 위해 기꺼이 팀을 짜준 고양시 시각장애인협회 박찬식 대표와  홍영옥 간사, 대한민국 성우회 김일영 운영위원과 조광진 사무국장, (주) 플랜두 김경덕 대표(고양시 시각장애인협회 후원회장), 기자 이렇게 6명을 일컫는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눈앞에 보이는 것은 완전한 어둠뿐이다. 시간이 지나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은,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의 감각과 입구에서 받은 지팡이 한 자루뿐이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공간에는 야광시계나 휴대전화 등 조금이라도 불빛을 낼 수 있는 물품은 반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자신을 ‘스테파니’라고 소개한 로드 마스터가 체험에 참여한 우리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쉽게’ 서 있는 차례대로 붙여 주었다. ‘빨ㆍ주ㆍ노ㆍ초ㆍ파ㆍ남.’ 기자는 ‘주황’으로 불렸다. 스테파니의 지시에 따라 우리 팀원들은 저마다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왼손은 벽을 짚으며 체험을 시작했다.

익숙하지만 낯선 환경 속에서 깨어나는 청각, 촉각, 후각, 미각
스테파니가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오라고 한다. 기자는 빨강의 뒤를 가늠하며 오른손엔 지팡이, 왼손은 주변의 물체를 더듬으며 조심조심 한발자국씩 앞으로 나갔다. 얼마쯤 가다 보니 새소리, 물소리가 들린다. 흙냄새, 풀냄새도 난다. 스테파니가 ‘숲’에 들어왔다고 알려준다. 그때 기자가 커다란 나무들이 빽빽하게 가로막은 곳에서 길을 잃었다. 지팡이를 옮기며 앞뒤좌우 오른손 왼손으로 번갈아 더듬어 봐도 손에 잡히는 것은 나무들뿐 빨강도 노랑도, 출구도 가늠할 수가 없다. 당혹스러움에 머리가 곤두섰다.

“저 주황인데요. 길을 잃은 것 같아요......”
“주황님이 길을 잃었다네요.” 스테파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내 왼쪽 팔꿈치를 손끝으로 살짝 스치며 방향을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이가 있다. 목소리를 들으니 노랑이다.

숲속 쉼터에 이르자 스테파니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대해 어떤 느낌인지 우리에게 물었다. “공포스럽다.” “머리가 아프다.” “불안하다.” 등 일단 이 상황이 두렵다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그때 파랑이 “스테파니님은 우리가 보이느냐? 혹시 지금 우리 모습을 누가 녹화해 보고 있느냐?”라고 다소 진지하게 재차 물어 예상치 않은 폭소를 자아냈다.

안내자의 지시에 따라 조심스럽게 걷다 보면 시각을 제외한 몸의 감각이 하나하나 살아나면서 점차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인 관계를 단절시키는 어둠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시각 이외의 다양한 감각들을 활용하게 되고 이를 통해 익숙하지만 낯선, 진정한 소통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 앞에서 느낀 낭패감
‘숲’을 빠져나와 도착한 곳은 도심 한복판 횡단보도 앞이다. 차 소리, 경적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곳에서 길을 건너야 하는데 신호를 감지할 수 없다. 그때 파랑이 “음성신호는 안 나오느냐?” 묻는다. 스테파니가 예산부족으로 음성신호기가 없는 신호등이라고 설명해준다. 가상임에도 불구하고 ‘잘못 건너다 차에 치이면 어떻게 하지!’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각장애인용 유도블록(시각장애인이 보행할 때 발바닥이나 지팡이의 촉감으로 위치나 방향을 알 수 있도록 표면에 돌기를 양각한 블록) 위에 낯선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다. 입간판인지 노점상이 벌여 놓은 물건인지 알 수가 없다. 두꺼운 운동화를 신어 발바닥 감촉으로도 유도블록을 느낄 수 없다. 유도블록 자체가 인식하기 어려운 소재는 아닌지, 혹시 금방 마모되는 것은 아닌지, 인도와 차도 간의 높이 구분은 되어 있는 것인지 걱정이 됐다.

▲ 점자블록은 경고, 직선블록은 직진을 의미한다.

어깨까지 구부정해지는 느낌으로 자전거에 부딪히고, 주차방지석에 부딪히고 어렵사리 다음 장소에 도착했다.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게 느껴지는 커피향에 익숙한 안도감이 든다. 이곳엔 ‘골드’라는 이름의 로드 마스터가 있다. 골드는 우리들에게 테이블 앞으로 모이라고 했다. 각자 모서리를 잡고 순전히 ‘감’으로 일렬로 섰는데 골드가 한 명 한 명 원하는 음료를 묻고 친절하게 서비스해준다. 기자는 내심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싶었으나 ‘골드가 뜨거운 커피를 서빙하다가 엎지르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으로 빨강을 따라 오렌지주스를 주문했다. 우연인지 그 공간에서 단 한 사람도 뜨거운 음료를 주문하지 않았다.

다소 긴장했던 터라 꿀꺽꿀꺽 병에 든 오렌지주스를 들이키는데 골드가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판매되는 캔음료 중에 시각장애인용 점자가 각인되어 있는 음료가 몇 개인지 아세요? 맥주, 식혜, 수정과 세 개밖에 없답니다.” 우리는 ‘정말? 시각장애인들은 내용물이 뭔지 알고 마시는 일상적인 권리조차 누릴 수 없단 말인가!’라는 느낌으로 웅성거렸다. “체험을 통해 느끼셨겠지만 시각장애인의 물건 위치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또 맹인안내견을 보시거든 애완동물에게 하는 것처럼 함부로 음식을 준다든지 해서는 안 됩니다.” 골드의 비장애인이 알아야 할 시각장애인에 대한 에티켓을 듣고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짧지만 특별한 체험을 마무리하고, 방명록에 “장애인과 함께하는 고양신문이 되겠습니다.”라는 문장을 새삼 꾹꾹 눌러 적었다.

▲ 시각장애 체험 후 설문조사를 하고 있다


직장동료, 연인, 가족이 함께 체험하면 금상첨화
어둠 속 공간 안에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시각장애체험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배려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혼자가 아닌 함께함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또 시각장애인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경험을 통해 입장이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발견하기도 한다. 시각장애체험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며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평소 사용하지 않던 감각들을 이용해 수행할 수 있는 일들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는 계기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상을 어둠 속에서 체험하며, 평범함 속에 스며든 특별함을 경험하는 공간 '센스 더 블랙(SENSE THE BLACK)'으로 이색체험을 떠나보자. 직장동료, 연인, 가족들과 함께 하면 금상첨화다.

▶문의 : e-mail ct1@kead.or.kr / 전화  031-910-0833~40 / 담당 일산직업능력개발원 재활상담팀 정상현

김지량 시민기자 (editor121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