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라 쓰고 ‘열정’이라 읽는다
고양영상미디어센터 노인 미디어교육
12일, 고양영상미디어센터 강의실에 모인 학생들이 캠코더를 열심히 이리저리 조작해 보고 있다. 버튼을 눌러보고 화면도 키워보고, 모르는 것은 옆 짝꿍과 상의한다. 쉬는 시간에도 학생들의 질문은 이어지고 큰 목소리로 수업을 하는 강사는 천천히 반복해서 설명을 해준다. ‘배움’의 열기로 후끈 달궈진 이곳은 평균연령 75세의 학생들이 모여 동영상제작 교육을 받고 있는 ‘레디 고양 실버멘터리’의 현장이다. 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들은 모두 정진회(정보기술진흥회)회원들이다.
컴퓨터에 대한 ‘배움’에 목말라 정진회를 만들어 30여명이 8년째 활동중. 이들은 2003년 일산노인종합복지관에서 컴퓨터 교육 수강생으로 만났다. 3개월의 교육기간은 컴퓨터를 더 배우고 싶다는 이들의 열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이들은 ‘실버넷 회’라는 동호회를 만들어 컴퓨터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일산노인종합복지관을 시작으로 대화중학교, 동구청, KT교육장, 능곡 주민센터 등 고양시 곳곳을 누비며 컴퓨터 기본 교육은 물론, 피나클, 베가스, 무비메이커, 파워포인트, 스위시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에 대한 공부까지 배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최근에는 KT 서포터즈에게 스마트폰을 배웠고 곧 아이패드도 배울 예정이다.
정진회로 명칭을 바꾼 이들은 배움에만 머무르지 않고 습득한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복지관이나 주민자치센터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노인이나 이웃들에게 배움을 나눠주고 있는 것이다. 올 3월에는 고양영상미디어센터 디지털 강의실을 기획 대관 형태로 빌려 정진회 자체회원인 정병숙(83세)씨가 강사로 참여해 동영상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교육을 2개월간 진행하기도 했다. 이들의 열기는 지난 5월 8일 부터는 고양영상미디어센터가 주관하는 ‘레디 고양 실버멘터리’ 맞춤형 실버 미디어 교육으로 옮겨왔다.
정진회 회원 14명이 참여한 이번 교육은 고양영상미디어센터가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노인 미디어교실 사업단체로 선정되어 개설된 프로그램이다. 매주 화요일 3시간씩 총 15회에 걸쳐 진행될 교육에서 이들은 다큐멘터리 기초 제작과 실습을 한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자신의 여생 동안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등 자신의 미래와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다. 이밖에도 ‘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고향이 고양이다’등의 세부 주제로 4개월 동안 기획, 촬영, 편집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교육 후 완성된 영상물들은 노인 영화제에도 출품할 계획이다.
김왕배 고양영상미디어센터장은 “젊은 사람들 보다 더한 열정으로 컴퓨터뿐 아니라 동영상 교육을 원하던 분들에게 체계적인 지원을 해드리고 싶었었는데 이번 문화부 지원 사업과 잘 연계가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정진회 사람들
정진회의 시초에는 이순자(75세)어르신이 있다. 8년 전 자기 계발로 시작한 컴퓨터 교육은 이 어르신에게 삶의 활기를 불어 넣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온라인상에 카페도 개설해 온, 오프라인의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 어르신은 워드프로세서 1급,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을 취득하며 여주대학 주최 전국 노인 정보화 경진대회에서 동상을 받았다. 또 고양시 노인 정보 경진대회에서는 최우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65세를 넘어서 알게 된 컴퓨터를 두고 “몸이 쇠약할 때 마지막 친구는 컴퓨터다. 노래도 듣고, 글도 읽는다. 은행업무, 주민등록등본, 쇼핑 등 생활도 편리해 졌다“고 말한다. 컴퓨터 강사로 활동을 하며 이메일에 대해 배운 수강생들이 보내온 이메일을 받아볼 때 가장 기쁘다는 이 어르신에게 컴퓨터는 세상과 만나는 통로다.
정진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찬원
40년간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박찬원(76세) 회장은 퇴직 후에도 가르치는 일과 인연을 계속 맺고 있다.
현재 화수초·중학교 컴퓨터실을 빌려 진행되는 화정1동 주민센터의 문화센터 프로그램 강사로 활동 중이다. 박 회장에게 배우는 사람들은 노인들만이 아니라 젊은 교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94세된 어르신을 8년째 지도하고 있다는 박 회장은 “잊어버리면 다시 배우고 또 배우면 된다. 배움에 왜 나이가 필요하냐”고 말한다. 그는 또 “스스로가 노인이라고 생각할 때부터 노인이 되는거다. 배우는 속도가 느린 것을 빼면 다른 학습 능력은 젊은이들과 같다”고 힘주어 말한다.
초기 멤버로 부회장을 맡고 있는 이상학(75세) 어르신. 피나클, 무비메이커 등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가르치며 그에게 배운 회원들이 카페나 홈페이지에 올린 작품을 보았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하는 자신보다 젊은 아들, 딸, 며느리에게 스마트폰을 비롯해 많은 것을 오히려 가르치고 있다는 이 부회장은 지금 한창 카카오톡을 하는 재미에 빠져있는 중이다. “비록, 어제 배운 것도 오늘 들으면 처음인 듯, 기억력은 떨어져 있지만 반복교육을 받다 보면 다 극복된다. 오히려 컴퓨터가 두뇌 활동을 자극해 잠재된 기억력을 높여준다. 치매예방에도 좋다”고 한다. 이 부회장은 자신의 자서전을 동영상으로 제작해볼 생각이다.
취재 중 “고양신문은 고양시민들만 보지만 우리 카페는 전국에 있는 회원이 다 본다”며 기자의 취재 모습을 거꾸로 캠코더에 담아 취재하는 어르신들을 보며 “세월을 이기는 장사들”이라는 표현이 실감났다. 손주의 재롱을 보며 조용히 뒷방으로 물러나 있는 어르신의 모습은 이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