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처럼 아름다운 고양, 몸과 마음에 흠뻑 담다
북한산에서 호수공원까지 25km, 1600명의 긴 행렬
어린이 청소년, 가족 친구 부부 연인 …숲과 물, 도시와 농촌 넘나들며 즐거운 걷기
각자에게는 버거운 결심, 함께라면 쉬운 일.
토요일 아침 8시 북한산성 입구, 따뜻한 잠자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고양바람누리길 걷기축제 풀코스 신청자 320명. 이들은 북한산에서 호수공원까지 25킬로미터의 길을 걷기로 한 사람들이다. 왜 그 먼길을 걷고자 했을까. 무엇을 얻고 싶어 온 것일까. 이들의 25킬로 길을 따라가 봤다.
출발은 산뜻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다만,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왜 고양바람누리길일까. 바람은 대답했다. "언제나 바람은 중요해요. 적당한 바람은 농사에도 꼭 필요한 것처럼"
교통수단이 없던 100년 전 200년 전에도 누군가 걸었을 이 길. 오늘 걷는 사람들에겐 결심이 필요했다.
10일, 제4회 고양바람누리길 걷기축제가 고양신문 주최로 열렸다. 북한산에서 숲 바람을 따라 일산 호수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함께 걷는 행사다. 농촌과 도시를 아우르는 정겨운 길을 가족, 친구, 연인들이 함께했다. 풀코스는 북한산에서 호수공원에 이르는 25킬로미터이고, 하프코스는 덕양구청에서 호수공원에 이르는 10킬로미터로 모두 1600여명이 함께 걸었다.
고양의 속살을 구경하는 재미
말없이 한동안 걸었다.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풍경이 말을 걸어와 옆 사람과의 대화가 필요 없다. 온통 가을 색의 산과 들은 자신만만했다. 땅을 박차고 나와 속살을 드러낸 무, 막바지 알을 채우는 배추, 너른 들의 억새와 갈대, 강아지풀까지도. 거름냄새가 코를 찌르기도 했지만 모든 게 정겹다.
조용한 마을을 지날 무렵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닭장 속 닭들과 토종개 심지어 너구리도 만났다. 김장을 하려는지 금방 뽑은 배추가 밭에 놓인 통에서 절여지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들과 호화로운 전원주택도 지나갔다. 행렬은 서울 교외선 대정역을 지나기도 했다. ‘고양에 이런 역이 있다니’ 대정역은 소박한 간이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목침, 수동식 선로 조작기, 역 간판은 빛바랜 사진 속 풍경을 추억했다.
단풍이 된 사람들
"엄마, 괜찮아? 완주할 수 있겠어?" 함께 걷던 딸이 엄마가 지쳐보였든지 걱정스레 묻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평화로운 마을길도, 호젓한 산길도 걸었다. 평지가 많았고 심심할 무렵 오르막이 나타났다. 오르막이 보이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옷을 한 겹씩 벗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다. "햇볕정책"이라고. 걸으면서 땀이 난데다 기온이 올라가자 자연스레 내린 처방이다.
은행잎이 깔린 샛노란 길이 한동안 이어졌다. 피톤치드 향이 나는 폭신폭신한 길, 사람들은 호사를 누리며 걸었다.
바람길 티셔츠를 똑같이 입은 아빠와 아들이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아빠는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초등생 아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결리고 저리다’며 다리가 먼저 신호를 보내왔다. 배도 출출해지고 에너지가 방전될 무렵, 꿀맛 같은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메타세콰이아 길을 따라 들어간 고양고등학교에서 흰떡과 물로 허기를 달랬다. 고양시걷기연맹 해설자가 들려주는 고양바람누리길 역사문화이야기도 재미있다.
산길은 이야기길
화수중학교 남학생 8명이 걸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학급에서 나누던 성적이야기나 수학문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 "축구 한게임 한 것 같다"며 힘들다고 했다. "학교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며 다른 친구가 위로했다. 마침 한 학생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자 장난기가 발동했다. "엄마, 포기했어요."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즐겁다고 했다.
뒤따라 오던 여학생들의 이야기도 들려왔다.
"여기 할아버지 뒷산이랑 비슷해. 노고산이야"
"어떻게 알아?"
"책에 나왔잖아. 덕양구청 지나서 노고산 있다고."
빨간 단풍이 곱게 물든 성라공원에 밥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한 밥상은 아니지만 돼지고기볶음, 따뜻한 된장국은 지친 사람들에게 기운을 북돋웠다.
몸이 기억하는 걷기의 매력
덕양구청에서 하프코스를 신청한 1200여 명이 합류했다. 거기서부터는 1600여 명의 구름인파가 걷기 행렬을 이뤘다. 건널목과 도로를 지날 때는 경찰이 안전을 도왔다. 경의선 곡산역, 백마역을 지나 강촌 공원에 접어들자 아파트 숲에도 가을색이 완연했다. 드디어 종착지점 호수공원. 다리는 절룩이는데 밀려오는 뿌듯함은 뭘까. 몸이 말해주는 기분 좋은 통증. 해냈다는 자신감. 함께한 사람들과의 연대감. 걷기축제의 매력은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