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유공자를 너무 작게 만드는 훈장
한국전쟁 숨은영웅 유격부대 목영설 대대장
8240유격부대 대대장 목영설씨. 1929년에 황해도 옹진군에서 태어난 그는 삼송리에 있는 삼송주택에 43년째 살면서 지역을 위한 일에 앞장서 왔다. 그런 그에게 지난 2012년에야 6.25전쟁에 참여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며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또한 2013년에는 정전 60주년을 기념하여 호국영웅기장증을 수여했다. 6.25참전에 대한 훈장이라기에는 너무나 늦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 8개 밖에 없던 사범학교 중 하나인 해주사범학교를 다니던 엘리트 목영설씨는 조국이 해방과 동시에 분단되면서 북에 있던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자 배제학당 3학년생으로 편입했다. 그러나 곧 발발한 6.25전쟁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부친이 다녔던 배재학당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서울서 유학생활 하던 차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당일에 점령되어버린 옹진군을 떠나 자신에게 피난 온 가족들을 데리고 집과 아버지가 계시는 옹진군 병원으로 북향했다. 남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상황에서 오히려 북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는 창린도라는 섬으로 들어가기 전 옹진학생들을 모두 규합해서 ‘옹진학도의용대’로 통합하고 18살의 목영설씨가 대장이 되었다. 이 의용대가 곧 8240유격부대가 된다.
이후 백령도에 있는 미군첩보단 극동사령부 8240부대 소속 정보장교는 “옹진반도와 3.8이남에는 네트워크가 없어서 고민거리였는데 찾아와주니 반갑다”며 “고향 다녀올 때 눈에 본 것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학생들이니 게릴라전을 해야한다며 폭발물, 지도보기, 무전기 사용법을 알려주고 소총과 쌀 몇 포대를 주었다. “그것을 받아서 창린도에 있는 학도대로 오니 학생들이 박수치고 좋아했지. 그때부터 유격전이 시작되는 거야.”
당시 미국이 현재까지 점령하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NLL(북방한계선)선을 긋자고 하자 김일성이 옹진반도 인근에 있는 섬을 빨리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952년 1월1일부터 학도대가 있는 용호도, 3일에는 순의도, 5일 어화도가 점령을 당하기 시작했다.
1월 8일 6시에 피난민들을 목포와 군산으로 함정에 태워 보낸 후 다음날 새벽 4시에 드디어 인민군들이 바다를 건너 창린도로 왔다. 인민군해병대 정예부대였다. 교전을 하는 건 학생신분으로 처음이었다. 창린도에 있는 250여 명의 옹진학도의용대는 1월 1일부터 계속 지기만 했던 패잔병들뿐이었다. 결국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철수명령을 내렸지만 사방이 섬인 곳에서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보리섬이라고 부르는 작은 바위섬이었다. 썰물 때 어렵게 섬에 도착해보니 작은 동굴까지 있었다. “창린도에서 새벽 4시부터 오후 4시까지 싸워 지친 의용대원들이 약 250명이 바위하나를 바라보고 건너가는데 그리로 기관총을 막 쏘는 거야. 민간인도 없다. 그러니까 눈감고 막 쏘는 거야. 죽으면 죽고 살면 사는 거고, 바닷물이 핏물이 되었지.”
하늘이 도왔는지 그 섬에 들어갔는데 그 바위에 굴이 하나 있었다. 1월 9일 한겨울에 바다를 건너왔으니 옷은 다 젖었고 잘못하면 대원들이 모두 동사할 상황이었다. “겨울에 물에 빠졌을 때는 옷을 벗어야 산다. 그걸 아버지한테 배웠어. 그래서 옷을 다 벗어라. 입고 있으면 졸음이 오고 그러면 얼어 죽어. 피부와 피부를 서로 비벼라.”고 시켰지. 동굴 밖에서 보니 젊은이들의 몸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기차에서 나오는 거 같았다.
밤이 되어 보초를 세웠다. 적이 수류탄 하나만 던지면 다 죽는 판이었다. 그래서 옷을 두툼하게 입은 대원 둘을 보초로 내보냈는데 아침에 나가보니 보초 서던 두 아이가 얼어 죽었다. 갯벌이 얼어서 시신을 묻을 땅도 파지지 않았다. 결국 양지바른 곳에 두고 가려는데 대원들이 자신들의 옷가지 하나씩을 두 동료의 시신 위에 덮어주기 시작했다. 18살 어린 대장의 마음에 묻은 대원들이었다.
11일 아침 10시가 되니까 조그만 발동선이 왔는데 뒤에 범선 3대를 끌고 왔다. 그렇게 해서 11일 그 바위섬에서 구조됐다.
3개월 후인 5월에 백령도 사령부에서 캡틴 마샬이라는 고문관 하나가 찾아왔다. “미스타목 작전 계획을 하자”고 그가 말했다.
맥아더 전법의 하나인 교란작전을 쓰자는 거였다. “목대장에게 책임자를 붙여 줄테니 인민군이 잘 보이는 곳에서 매일 훈련을 해라. 그러면 인민군이 반드시 올거고 그때 비행기에 인민군의 위치를 보고하면 공중에서 소탕하겠다”는 것이었다.
작전명 D11(donky 11). 드디어 7월 15일, “새벽 4시에 출발해서 새벽 6시에 섬 바닷가에서 내려 교두보를 지나는데 그제서야 갑자기 총소리가 사방에서 나는 거야. 내 옆에 있던 책임자가 키가 크니까 목에 맞았네.”
미군 책임자가 후송되고 나니 사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비행기와 교신할 수가 없었다. “인민군은 계속 공격해오고, 명령권자가 없으니 비행기는 빙빙 하늘에서 돌기만 하고 공격은 못하지, 지상군책임자는 난데 이 작전은 실패다. 이젠 다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책임자가 떨어트리고 간 무전기에서 영어로 그냥 막 뭐라하는 거야. 근데 딱 끊어지더니 ‘적군과 아군 식별불가’라는 한국말이 나오는 거야. 나도 총 맞을까봐 드러누워서 머리 들지도 못하고 있다가 무전기를 들고 교신을 시작했어. 우리가 윗 옷을 벗어 흰색 옷을 입고 있을테니 우리들 앞으로 10미터를 쏘면 된다”고 말했다. “문법이 무슨 소용이 있어. 무전기를 들고 영어로 화이트칼라는 우리 편이다 라고 말하니 롸저! 하는 거야.”
표적이 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대원들은 런닝구 바람으로 섰고 비행기는 10미터 앞을 쏘고 그렇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가자 옷을 다시 입으라 명령을 내렸다. 계속 쏘고 전진하고 그렇게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휴전이 되자 미군들은 철수하기 전에 유격전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가야 한다며 덕소에 유격군사관학교를 만들었다. 목영설씨는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군이 되었다. 그는 소위를 건너뛰고 바로 중위를 달았다. 그리고 한국 군인으로 43살에 소령으로 전역했다.
그런데 그가 총 근무한 연수가 연금받기에 1년이 부족한 19년이었다. 군인은 전쟁에 1년 참여한 경우 3년 근무로 인정해주는 것이 있었기에 3년간 전쟁터에서 싸운 그는 9년을 인정받아야 했지만 계급장도 군번도 없고 게다가 옹진군이 고향이기에 호적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연금을 받을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중위로 대한민국 국군의 장교로 받아주었으면서도 연금을 줘야할 때는 한국 사람이 아니다, 국군이 아니다 는 온갖 조건을 붙였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미 극동사령부의 정보활동이 비밀해제되면서 60년 만에 옹진군 학생들이 바다를 건너서 싸웠던 8240부대의 전투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국가에서는 60년 만에 8240유격부대 대대장 목영설씨에게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
43살에 전역해서 삼송리 삼송주택에서 43년을 살았던 그에게 주어진 훈장. 그동안 연금도 받지 못했던 그에게 최근에야 국가유공자로서 22만원의 연금을 지급하고 있었다. 2년 전 훈장을 받은 후 국가유공자연금보다 2만원이 많은 충무무공훈장 24만원의 연금으로 전환해서 받고 있다. “최고의 훈장이라고 하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은 대한민국을 살린 사람이라고 봐야죠. 그런데 그런 사람한테 25만원을 줍니다”며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는 목영설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으니 영광만 받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건 아니다. 이런 대접 받으려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들이 또 나올까. 이런 문제로 나라의 영웅을 너무나 초라하게 만드는 일은 이제 그만. 그분들께 마땅한 대우를 하는 우리의 인간에 대한 예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