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재능의 산물임과 동시에 시대의 산물”
고양작가회의, 문학평론가 염무웅 초청 강연
고양작가회의(회장 정수남)가 주최하고 고양시가 후원하며 작가연대, 고양신문이 주관하는 ‘제21회 원로작가 초청 평화통일 문학강연회’가 지난 22일 일산동구청 다목적교육장에서 개최됐다. 이날 강사로 나선 문학평론가 염무웅 전 영남대 교수는 청소년기에 접한 문학 이야기, 그리고 통일과 ‘옳은 문학’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이날 강연한 내용을 요약·정리한다.
독일통일, 성향 다른 이 협력해 이뤄
종교도 문학도 정치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남북관계의 긴장이 풀릴 때만 종교적, 문학적 교류도 가능해진다. 남북관계가 얼어붙었을 때는 종교적, 문화적 교류는 중단된다.
독일의 경우는 우리와 달라 동서독이 분단되었을 때조차도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활발했다. 동독에 대한 전방위적인 지원과 교류를 통해 통일로 나아가자는 이른바 ‘동방정책’은 독일 내 보수층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보수층은 동독과 수교하는 나라와 단교하고 서독은 자유주의 서방과 유대를 굳혀 힘 우위로 통일을 압박하자는 이른바 ‘할 슈타트 원칙’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타계한 독일통일의 입안자인 에곤 바르는, 보수정당인 기민당의 총리임에도 헬무트 콜이 동방정책을 지지함에 따라, 그의 소신대로 동방정책을 꽃피울 수 있었다. 에곤 바르의 동방정책은 동독에 대해 실체를 인정하고 ‘접근을 통한 변화’를 모색하는 정책이었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강대국뿐만 아니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작은 나라들도 독일통일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 나라를 설득해낸 사민당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와 뒤이은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도 독일 통일에 큰 몫을 해냈다.
이렇게 성향이 다르고 당이 다른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통일’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는 서로 협력한다는 점을 우리가 배울 만하다.
순문학과 함석헌에 빠진 청소년 시절
청소년 시절, 나에게 큰 충격을 준 소설작품은 손창섭의 단편집 『비오는 날』이었다. 이 소설에 담겨진 ‘암울한 세계’는 ‘아 이것이 문학이로구나!’라고 느낌을 처음 전해주었다. 이전까지 읽던 통속소설 대신 『비오는 날』을 계기로 순문학에 빠져들었다. 당시『사상계』도 많이 접했는데 함석헌 선생의 글과 그 문체에 매료되어 ‘함석헌 숭배자’가 되었다. 나는 순문학이 주는 아편과도 같은 독한 향을 버릴 수도 없었고, 함석헌 선생이 주는 실천적 이상주의적 사상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절충점은 대학에 들어가 독문학을 전공하는 것이었다. 철학도 배울 수 있고 문학도 탐독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60년에는 우리나라 지식 사회의 풍토는 ‘실존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당시 사르트르,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이 많이 회자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출판사에 취직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식민지 시대의 작가들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고 1968년부터 계간 『창작과 비평』의 편집동인으로 활동하게 됐다.
문학은 예술적 면·시대적 면 모두 중요
『창작과 비평』의 편집동인으로 활동할 때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번역하기도 했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하우저는 ‘부다페스트 일요서클’이라는 지식인 모임에 참여해 사회학자 칼 만하임과 미학자 게오르그 루카치와 교류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영국 등으로 유랑하며 나이 환갑에 가까워서야 친구인 칼 만하임의 도움으로 첫 저서를 발표했는데, 그것이 유럽 지식계에 충격을 던진『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였다.『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문학, 음악, 건축, 그림, 영화 등 모든 예술 장르를 사회사적 방법론으로 분석한 책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낳은 모든 예술작품은 사회경제적 산물이라는 전제 하에 개별 예술 작품과 사회역사적 상황의 상관관계를 밝히면서 예술사적 의미를 규명해 낸 책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번역하며 내가 배운 것은 하나의 문학작품에는 순수한 예술적 측면과 문학작품을 생겨나게 하는 사회역사적 측면이 함께 녹아들어 있다는 점이다. 즉 문학의 재능의 산물임과 동시에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문학을 통해 예술적 성취를 이루면서 동시에 시대에 기여하고자 할 때 ‘문학다운 문학’이 된다. 정치적 목적으로서만 문학이 기능할 때 ‘옳은 문학’이라고 할 수 없고, 유미주의에만 도취된 문학 역시 ‘외소한 문학’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