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을 가로지르며 생명의 땅 적시는 물의 길이 있었네
호수공원에서 행주양수장까지 농수로 따라 걷기
오래간만에 나선 나들이길, 이번에는 벼농사를 짓는 들녘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농수로를 따라 걸어보자. 농수로를 바라보며 걷기에는 일 년 중 지금이 가장 적당한 때다. 모내기철이라 수위를 잔뜩 높여놓았기 때문이다. 농수로를 가득 채우고 느긋하게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걷노라면 자연스레 마음이 넉넉해진다. 출발점은 호수공원이고 도착지점은 행주산성 역사공원으로 잡았다. 그 곳 덕양산 기슭에 물길의 시작점인 행주양수장이 있기 때문이다. 행주양수장에서 퍼 올린 한강물이 긴 여정을 따라 고양땅의 서쪽 끄트머리 이산포를 지나 파주 산남리까지 흘러간다. 농수로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가는 길에선 어떤 풍경들이 반겨줄까.
줄지어 선 벚나무 그늘을 만들고
호수공원에서 농수로길로 접근하려면 폭포광장에서 낙수교를 지나 왼편으로 열린 출구를 통해 청평지가 있는 샘터 광장쪽으로 발길을 옮겨야 한다. 느티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게이트볼장을 지나며 오른쪽 언덕 아래로 시선을 던지면 일직선으로 뻗은 농수로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신도시 구역의 경계를 따라 파내려간 해자(垓字)처럼 보인다. 계단을 따라 내려서서 본격적인 농로길을 따라 걷는다. 출발점에서부터 섬말다리까지는 직선으로 뻗은 넓은 길이 이어진다. 수로 옆으로는 벚나무가 줄지어 늘어 서 있다. 벚꽃이 필 즈음에는 나름 화사한 꽃터널을 만들더니, 지금은 꽃 진 자리마다 윤기나는 버찌 열매를 매달고 있다. 길 왼편의 너른 땅에는 시설재배 하우스와 관상수를 기르는 나무농장들이 교대로 이어진다. 중간 중간 넝쿨장미와 산딸나무가 시절의 주인공 자리를 다투듯 화사한 자태로 나들이꾼을 반긴다.
수면에 얼굴 비추는 풀꽃들과 인사하기
농수로길은 섬말다리 근처에서 백석동과 능곡을 잇는 큰 도로와 교차한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섬말상회는 수로길 여정에서 만나는 유일한 가게다. 가게 앞에는 작은 식탁도 놓여 있어 잠시 숨을 돌리고 가기에 적당하다. 농수로가 섬말다리가 놓인 도촌천을 건너면 풍경이 한결 달라진다. 농로길은 좁아지고 물과는 더 가까워진다. 벚나무 가로수와의 이별은 아쉽지만, 수로변의 둔치를 가득 점거하고 자라나는 풀꽃들의 인사는 더없이 정겹다. 엉겅퀴, 민들레, 개망초, 그리고 다종다양한 수변식물들의 푸르른 잎들이 바람을 타고 낭창거린다. 수변 풍경만 보면 풍요로운 자연 하천 경관이 부럽잖다. 중간 중간 나타나는 단조로운 시멘트 다리에 올라서면 물길과 농로가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나란히 뻗은 시원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멀리 실루엣으로 보이는 신도시 고층 아파트의 스카이라인도 새삼 멋스럽다.
하천 만나면 겸손하게 몸 낮추고
행주양수장을 출발해 호수공원까지 오는 동안 농수로 물길은 자연하천과 세 번 만난다. 순서대로 행신천, 대장천, 도촌천과 교차하는 것이다. 하천은 한강을 향해 흐르고, 농수로는 한강과 나란히 평행으로 이어지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농수로가 하천을 통과하는 방법은뭘까? 정답은 ‘납작 엎드리기’다. 관을 깊게 묻어 하천 바닥 아래를 통과하는 ‘잠관’ 방식을 빌려 인공의 물길은 자연의 물길에 대한 예의를 갖춘다. 요즘처럼 수위가 높을 때는 잠관의 입수부 쪽에서는 격렬한 유입 물결이 형성된다. 반면 잠관을 통과하고 나온 출수부 쪽의 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느긋하고 유유하다. 사실 농수로를 따라 이어진 길은 일반도로가 아니라 농로에 속하기 때문에 걷기에 적합한 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차도와 인도 구분은 당연히 없고, 차라도 지날 때면 길가로 비켜서야 할 정도로 좁은 구간도 많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차량 통행 자체가 많지 않은 길이라서 요즘같은 만수기 때 한 번쯤 걸어볼만하다. 다만 그늘이나 쉼터는 기대할 수 없으니 모자와 썬크림은 필수다. 아니면 아예 흐린 날에 길을 나서는 게 좋겠다.
물길이 먼 길을 마다않는 이유는
행주에서 퍼올린 한강물은 행주내동, 토당동, 장항동을 지나 법곳동과 가좌동, 구산동까지 공급되며 지나는 곳마다 좌우로 펼쳐진 드넓은 논을 적신다. 조금 궁금했다. 행주에서 가까운 토당동이나 신평동은 그렇다 쳐도, 거리가 꽤 먼 장항이나 송포, 이산포 들녘에서도 굳이 행주에서 길어올린 물을 사용하는 이유는 뭘까? 하나같이 한강변을 따라 펼쳐진 들이니 각각 가까운 곳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게 편하지 않을까? 그 이유를 삼성당 마을에서 마주친 토박이 어르신에게 물었더니,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친구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 핀잔을 섞어 한마디 하신다. “행주쪽이 이산포보다 높잖아. 물은 낮은데로 흐르니까 한번만 퍼올리면 지가 알아서 흘러가는데 뭐하러 각각 퍼올려?” 듣고 보니 그렇다. 지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설계한 것이 바로 농수로 아닌가. 너무도 당연한 이치를 몰랐다니, 농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헛똑똑이들임에 틀림없다.
한걸음에 지나는 능곡 들녘
호수공원에서 섬말다리까지 이어진 벚나무길에 이어 섬말다리에서 삼성당까지 이어지는 들풀길도 끝나면 능곡 들판을 지나게 된다. 이 코스는 특별한 매력이 없다. 다행히 행주산성이 자리한 덕양산이 정면에 보이니 목적지까지의 완주에 의미를 두고 속도를 내 보자. 음식점 거리가 시작되는 행주마을 입구에 도착하면 물길을 따라 걷는 것은 끝이다. 물길 옆으로농로가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버스가 들어가는 큰 길을 따라 행주산성입구를 지나 시정연수원 이정표를 따라 걸으면 행주산성 문화공원이다. 비로소 여정의 종착지인 행주양수장에 도착한 것이다.
알수록 흥미로운 물길의 이치
한국농어촌공사 고양지사에서 관할하는 행주양수장은 1985년에 만들어진 농업기반시설이다. 최근에 노후된 모터를 새 것으로 교체하는 등 30여 년 만에 대대적인 리모델링 작업을 했다. 행주양수장에 들른 기념으로 농업용수의 공급 시스템을 잠시 살펴보자. 농어촌공사에서 관할하는 농수로는 각각 용수간선, 용수지선, 용수지거 등이 있다.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국도가 갈라지고 다시 지방도가 실핏줄처럼 이어지듯, 물길 역시 큰 물줄기에서 작은 물줄기로 단계별로 갈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농수로를 이용해 수위를 조절하거나 개폐시설을 열고 닫으며 먼 곳의 논까지 골고루 물을 공급한다. 행주양수장에서 퍼 올린 큰 물줄기는 35.7km의 용수간선을 따라 종착지인 파주시 교하읍 산남동 일대까지 이어진다. 종점까지는 대략 열 두 시간이 걸린다. 중간에 만나는 대장양수장에서는 물을 다시 퍼 올려 용수지선을 통해 지대가 높은 대장동, 내곡동, 주교동, 산황동까지 공급하기도 한다. 행주양수장에서는 매 년 물 공급을 시작하는 4월에 한 해 농사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통수식을 연다. 물은 논농사가 마무리되는 9월 20일경까지 공급된다.
이가순·이원재 선생을 기억하며
행주양수장에서 나와 최근에 조성한 수변 공원으로 내려선다. 나들이를 마무리하기 전에 반드시 알현해야 할 비석이 있기 때문이다. 행주수로길을 걸으며 한 번쯤 기억해야 할 두 사람, 양곡 이가순 선생과 그의 아들 이원재 선생의 삶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세운 공덕비다. 1950년대 초에 세워진 공덕비는 애초에 능곡역으로 가는 큰길가에 세워졌다가 행주양수장 정문 안쪽으로 옮겼는데, 최근에 다시 새로 조성한 행주산성 역사문화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이가순 선생은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독립지사 중 한 분인데, 만년에 토당동에 자리를 잡고 가뭄으로 고생하는 지역민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한강물을 끌어올리는 관개사업을 벌인 선각자였다. 안타깝게도 물길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되었는데, 그가 이루지 못한 사업을 아들 이원재 선생이 이어받았다. 한 마디로 이가순 선생과 이원재 선생은 고양땅에 가장 먼저 선진적인 농수로를 만들고 수리조합을 결성한 분들이다. 공덕비 옆에 세워진 안내문은 한번 쯤 천천히 읽어볼 만하다. 두 부자를 기리는 마음이 절절히 녹아있는 명문장이다. 고양의 농경 역사에 의미 있는 매듭 하나를 남긴 양곡 이가순 선생. 오늘 걸은 길을 ‘이가순의 길’이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하리라. 몇 해 전에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이가순 선생의 삶이 재조명되어 호수공원 주제광장 인근에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새로운 돌비석이 커다랗게 세워지기도 했다.
마을버스를 타고 행주산성을 빠져나오며 오늘 걸었던 길을 되새겨본다. 사실 호수공원에서 행주산성까지 이어지는 걷기 길은 이미 평화누리길 4코스인 행주나루길이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도로 중심으로 이어진 평화누리길과는 달리 물길과 나란히 걷는 ‘이가순의 길’은 우리 삶의 토대인 먹거리, 그 중에서도 벼농사의 이치와 가치를 한 번쯤 생각머리에 놓아보기를 나들이꾼에게 넌지시 권한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식탁에 올라오는 흰 쌀밥을 새삼스런 반가움으로 받아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