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숲 오솔길이 건넨 무념무상 한나절
[유경종 기자의 하루여행] 파주 광탄 박달산
고양동에서 혜음령로로 이어진 이웃 산
높지는 않지만 길게 이어진 능선길
전망대 서면 북한산과 송악산 한눈에
나무·들꽃과 함께 걷는 여유로운 산행
[고양신문] 한가위를 앞두고 ‘불효자는 옵니다’라는 웃픈 카피가 회자되고 있다. 이동도 밀집도 피차 민폐인 시절, 나들이 욕구가 차오른다면 평소 가보지 않았던 주변의 작은 산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무명무심(無名無心)한 산행을 해보면 어떨까.
파주시 광탄면 뒷산인 박달산으로 향한다. 고양시와 파주시, 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개명산 자락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야트막한 산이다. 높이는 370m에 불과하지만 능선이 길게 이어져 있어 용미리와 분수리, 신산리, 영장리, 마장리 등 광탄면의 고만고만한 마을들을 산기슭에 두루 거느리고 있다.
고양동에서는 혜음령로를 따라 차를 달리면 15분만에 박달산 등산로 입구에 닿는다. 혜음령로는 과거 한양과 개성을 이어주던 역사 깊은 옛길이다. 임진강을 건너온 중국 사신들이 혜음령 고개를 넘어 고양동으로 들어와 벽제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한다. 박달산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커다란 바위 부처님 두 분이 나란히 서 있는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93호)도 만날 수 있고, 고려 중기의 명장 윤관장군 묘(사적 323호)도 커다란 규모로 정비돼 있다.
밤송이 속에서 익어가는 가을
박달산(朴達山)이라는 이름은 산에 박달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산 주변에 독수리가 많아 수리봉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요즘에는 사람 독수리들이 산에서부터 활강을 하기도 한다. 패러글라이딩 이륙장이 능선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행 출발점은 광탄면행정복지센터, 또는 신산터널 입구에서 시작하면 된다. 정상까지의 거리는 4km. 울창한 나무 그늘 사이로 오솔길이 정겹게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산들이 대부분 그렇듯 침엽수숲과 활엽수숲이 번갈아 나타난다. 햇살은 제법 따갑지만 수분이 빠진 가을공기가 보송보송 상쾌하다. 길게 이어진 오솔길 위로 나뭇잎에 부서진 햇살조각이 살랑인다.
가을에는 아무래도 밤나무가 가장 반갑다. 벌어진 밤송이 사이로 밤알갱이들이 윤기를 반짝인다. 크기가 작은 쪽밤들이다. 다람쥐 식량을 가로채선 안되니까 두 알만 집어 들어 껍질을 벗긴다. 역시 초가을 생밤이 까먹기가 가장 좋다. 속껍질이 아직 촉촉하기 때문이다. 군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초소 주변에서 주운 밤을 양철 군번줄로 벗겨먹곤 했었다. 30년 전 일인데도 오도독한 식감이며 고소한 맛이 생생하다. 혀는 두뇌보다 기억력이 좋은가보다.
북한산이 건너다보이는 전망대
힘들여 산에 오르는 이유가 뭘까. 산 어딘가에 선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전망이다. 대개는 산 정상에 가장 큰 선물이 숨겨져 있게 마련인데, 박달산은 초장에 선물을 미리 개봉한다. 1km쯤 걸었을 무렵 시야가 탁 트인 전망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혜음령로를 따라 자리한 분수리와 용미리가 한눈에 들어오고, 용미리묘지 너머로 고양땅이 건너다보인다. 남쪽으로 와이시티, 중앙에 킨텍스마을, 그리고 북쪽의 제니스타워까지. 멀리서도 잘 보이는 일산의 랜드마크 3총사다. 시선을 조금 왼쪽으로 돌리면, 북한산의 우뚝한 산머리가 조망된다. 바위산에 드리운 실루엣이 장엄하면서도 멋스럽다.
오르막 내리막 반복되는 산길
다시 정상을 향해 발길을 재촉한다. 전망대까지 꽤나 가파른 경사를 올라왔으니, 이제부터는 느긋한 능선길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섣부른 기대였다. 산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수차례나 반복한다. 무명무심 느긋한 산행을 기대했는데 숨이 차오르고 목덜미가 땀에 젖는다. “높이만 가지고 산행의 난이도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해서 송구합니다”라는 인사를 박달산에게 전해야 할 것 같다.
지나간 여름장마가 워낙 길었던 탓인지, 올해 숲에는 나무이끼들이 유난히 푸르르다. 그윽한 숲의 생명력이 나무마다 서려있는 듯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난데없는 포 사격소리가 들려온다. 가까이에 군부대가 있나보다. 산행 중 마주치는 군사시설들은 경기북부 산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익숙한 흔적들이다.
송악산 한눈에 조망되는 정상
마지막 경사길을 가파르게 올라 박달산 정상에 도착한다. 수리봉 헬리콥터 착륙장이 곧 정상 쉼터다. 평범한 마을 뒷산답게 정상의 풍경도 소박하다. ‘박달산, 370m, 광탄산악회’라고 적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 뒷면에는 산악회원들의 이름이 정겹게 모여 있다.
전망데크는 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만들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남산과 관악산, 인천 계양산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파평산, 감악산, 감악산 등 오밀조밀한 파주땅의 산들이 이어진다. 더 멀리 임진강 건너로는 북녘땅 개성 송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서울과 고양의 산에 오르면 어디서든 북한산이 보이듯, 파주에서는 어느 산에 오르든 친근하게 조망할 수 있는 산이 바로 개성 송악산이다.
특별할 것 없었지만, 그렇다고 심심하지도 않았다. 오솔길은 아기자기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졌고, 숨이 차는 고비마다 벤치와 평상이 반겨줬다. 무뚝뚝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친철한 산이 박달산이다.
내려가면서는 중간 중간 지나쳤던 작은 풀꽃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사진도 몇 장 찍어야겠다. 그러려면 서두르자. 가을 해가 많이 짧아졌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