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어떤 방에 있습니까

김민애 [어느 책모임 중독자의 고백]

2020-10-30     김민애 기획편집자/독서동아리 활동가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추적단 불꽃, 이봄)

김민애 기획편집자/독서동아리 활동가

[고양신문] 올해 초 처음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기사화되었을 때였다. 도대체 N번방이 뭐기에, 가 첫 번째 든 생각.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 방에 들어간 남성들한테 구역질이 났다. 생각이 여기서 멈췄으면 딱 좋았으련만. 결국 사고의 종착점은 그러니까 애초에 왜 그런 데 발을 디뎌서라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그 말을 누구에게도 한 적 없지만 머릿속에서 완전히 내몰 수가 없었다. 왜 난 온전히 피해자 편에 설 수 없을까. 나한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정말 그럴까?

대학 1학년 시절은 지하철이 끊기기 전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마시고 취하던 나날이었다. 단골 술집에는 허술한 남녀공용 화장실이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맥주를 퍼마시고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볼일을 보던 중이었다. 미처 옷을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모르는 남학생이 들어왔다. 내가 소리 지를 틈도 없이 남학생도 당황했는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20년도 더 지나서 문득 떠오른 기억이다. 남학생은 화장실에서 볼일 보던 여학생에 대해서 뭐라고 떠들고 다녔을까. 그게 고의든 아니든 말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같이 술 마시던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택시를 타기 위해 골목을 나서는 길이었다.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어디 가냐고 물었다. 아무 대꾸도 않고 걸음을 재촉하는데 술 한 잔만 더 하자고 지분덕거린다. 단호하게 거절하자 내 가슴을 꽉 쥐고는 어두운 골목으로 내뺐다. 쌍욕을 하고 몸을 틀었지만 성추행범은 이미 사라진 뒤였고, 나는 어둠 속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쫓아갔다가 더한 봉변을 당할지 모르므로. 나는 아무 힘이 없었다. 늦게 술 마시고 돌아다닌 내 탓이었다.

하나하나 곱씹어 보니, 이런 식의 기억이 한둘이 아니다. 자주 가는 호텔 바에서 술 사겠다는 거래처 사장, 남자친구가 있다는데도 거짓말하지 말라며 데이트 신청하는 남자, 새벽에 보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는 남자 등. 호감과 관심, 호의와는 전혀 다른 맥락의 신호를 보내는 이들에게 난 어떤 태도였나. 매번 정색하지 않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충 넘어갔다. 나쁜 사람, 까칠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게 적절한 대처였다면 왜 이제 와서 분노가 차오를까.

언젠가부터 유흥가 건물 화장실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화장실 안 아주 작은 틈새를 휴지로 돌돌 말아 끼워 놓은 걸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구멍에 불법 카메라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찍힌 영상은 음란물 사이트에서 수많은 남자들에게 공유된단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추적단 불꽃, 이봄刊). N번방 최초 보도자 추적단 불꽃의 르포 에세이다.

공모전에 응모하겠다고 SNS 음란물 취재를 시작했다가 텔레그램 N번방까지 들어간 추적단 불꽃’. 기자들의 후속 취재가 시작되고 주범이 검거되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그 방에 갇혀 있다. 이상한 경로로 수집되는 음란물을 공유하면서 여성을 희롱하는 그들을 그냥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피해자들이 보이지 않는 손을 내밀어 구해 달라고 소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음란물 제공자는 범죄자가 되지만, 그 방에 들어가 있는 남자들은 당당하다. 개인적으로 즐기는 것, 혼자서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국회의원들이 그들의 편이기에 가능한 건가 보다. 그들의 음란한 말과 시선에 여성 피해자는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도.

추적단 불꽃이 페미니즘으로 무장한 특별한 여성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들도 학창시절 남자 교사에게 팔뚝 안쪽을 꼬집혔고, 남자 친구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고, 지하철에서 모르는 이에게 추행을 당하고도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언제든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바로 그들, 당신 그리고 우리처럼.

N번방 기사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가해자의 인생사가 아니고, 피해자의 피해 내용이 아니다. 가해자의 범죄 방식과 가해자의 덫에 걸린 피해자에 대한 연대다. 우리라고 피해자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기에.
그래서 추적단 불꽃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