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세계유산 등재 염원하며… ‘공부하고 답사하고’

북한산성 시민학교 개교

2020-11-17     유경종 기자

박기성 한국등산사연구회장 강연
시민 40명 참가의상능선 성곽 답사

[고양신문] 북한산과 북한산성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북한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염원하며 함께 공부하고 산성길도 걷는 북한산성 시민학교14일 북한산 플레이에서 첫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북한산성 세계유산 가자!’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북한산성 시민학교는 경기문화원이 주최하고 경기도·고양시·고양신문이 함께 후원하는 시민참여 프로젝트로서, 북한산의 생태적 가치와 북한산성의 역사·문화적 의의를 재조명하기 위한 강연과 탐방으로 한 달 일정을 기획했다.

첫 일정으로 박기성 한국등산사연구회장이 사전신청을 통해 모인 40여 명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북한산과 북한산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박기성 회장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북한산성의 유구한 역사의 흔적을 옛 문헌을 통해 짚었다. 이 자리에는 이창우 전 킨텍스사업단장, 안재성 고양시향토문화진흥원장, 북한산과 북한산성을 소재로 수년간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석환 화가와 이재용 사진작가도 호기심 많은 수강생이 되어 강의를 경청했다.

오후에는 고양신문산악회 임철호 대장의 인솔로 대서문~국녕사~가사당암문을 거쳐 의상봉 코스의 성곽과 성문을 직접 만나보는 현장탐방이 진행됐다. 한 참석자는 강의를 들으며 북한산성의 오랜 연원을 알게 됐고, 답사를 통해서는 성곽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만났다는 소감을 밝혔다.

북한산성 시민학교는 다음달 5일까지 매주 토요일 진행된다. 추후 강의는 21()-북한산의 지리와 환경(박종관 건국대 교수) 28()-북한산성의 역사적 가치·세계유산등재 필요성(최재헌 건국대교수) 125()-북한산의 시공간 스토리텔링(유경종 고양신문 기자) 순으로 진행된다. 아울러 29()에는 참가자들과 함께 북한산성 12성문 종주에 도전한다.

이영아 고양신문 대표는 북한산성 시민학교의 목적은 북한산에 대한 고양시민들의 폭넓은 사랑을 북한산성에 대한 이해와 관심으로 연계하는 것이라며 북한산성을 보다 깊이 알고 사랑하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의를 들은 후 탐방에 나선 참가자들이 대서문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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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시민학교 제1강 주요내용]

북한산과 북한산성

강의 : 박기성 한국등산사연구회장

북한산성 시민학교 첫 강의를 진행한 박기성 한국등산사연구회장

북한산(삼각산)의 위치

북한산은 중부지방 한강유역 북쪽 울타리인 한북정맥 주맥에서 남쪽으로 약간 내려온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지대가 얕은 한반도 중부 서해안 지역에서 836m 높이로 뚜렷이 솟아 있어 일대의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대한제국 시기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전국 12종산의 으뜸으로 기록되어있다.

북한산(삼각산)의 지형과 지질

북한산의 주봉들은 중생대에 형성된 화강암 바위로, 대체로 흰색을 띤다. 인수봉, 백운봉, 노적봉 등 가파른 돔형 봉우리에 초목이 없어 먼 거리에서도 뚜렷이 보인다.

주릉은 우이령에서 보토현(補土峴)까지 남북방향으로 이어진 11km 산줄기다. 주릉 동쪽은 골이 발달하지 않고 주변 충적평야와 이어져 있으나, 서쪽에는 사기막골(청담동)과 북한동이라는 큰 골이 있고 그 물이 흘러내려 덕수천(창릉천)을 이룬다. 인수봉은 돔 형태가 특히 뚜렷하고 보현봉에서 인수봉까지 뻗은 긴 용마루의 용두 자리에 있다.

지명의 변천

북한산은 삼국시대에 부아악(負兒岳), 화산(華山), 화악(華岳), 횡악(橫岳)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와 조선에서는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렸다. 북한산(北漢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건 일제강점기 이후다.

북한산의 지정학

북한산은 남북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수운을 이용한 물산 집결지로서 전국의 봉수 연락이 용이한, 교통과 통신의 중심지인 한양의 진산이었다.

신라 진흥왕은 북한산 비봉에 진흥왕 순수비를 세웠다. 삼국시대에는 장단나루를 건너 설마치와 광적, 의정부를 지나 지금 광나루의 양주에 이르던 길이 당시 1번 국도였던 한천길이었다. 고려시대 이후부터는 임진나루(동파역)~파주~광탄~혜음령~구파발~연신내~홍제동~세검정~자하문 고갯길~남경으로 바뀌면서 북한산은 동쪽보다 서쪽이 훨씬 중요한 지역이 된다.

고려 조정은 한양을 개경의 배후지, 왕실의 피난처로 인식하며 장의사와 승가사, 신혈사(진관사), 삼천사, 향림사, 인수사, 청담사 등의 대형 사찰이 나날이 번창하게 된다.

오랜 세월 이어진 북한산성 축성 논의

1451년 문종 원년에 삼각산을 비롯해 한양도성 주변의 축성 논의가 시작됐다. 선조와 효종 시대에도 임금이 이덕형, 송시열 등의 대신들과 축성 계획을 의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건 1674년 숙종 임금 즉위 이후부터다. 하지만 청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30년 넘게 진도가 나가지 않다가, 청나라의 정세 변화 틈새에서 비로소 1711(숙종 37)에 이르러서야 축성을 추진하게 된다.

6개월만에 마무리된 공사

4월에 시작한 공사는 6개월만인 10월에 마무리됐다. 7620(11.6km)의 성곽, 2807첩의 여장, 14성문, 행궁(行宮)과 사정(射亭)과 관성소(管城所),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유영(留營), 장대(將臺) 3, 누각 3, 창름(倉廩) 8, 사찰 13, 교량 7, 연못 26, 우물 99개가 북한산성 안에 마련됐다.

숙종은 1714년 친히 북한산성을 둘러본 후 후 중흥산성 옛 성터에 중성(重城) 축조를 지시했다. 중성 축조에는 2년이 걸렸다. 1719에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이 축조되며 3성 방어전략이 비로소 완성된다.

1745년에는 팔도도총섭 성능 스님이 <북한지(北漢誌)>를 편찬한다.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북한산 각 봉우리들의 지명은 대부분 <북한지>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

북한산성 이전의 산성에 대한 기록들

<고려사> 지채문(智蔡文) 열전에 새벽이 되자 지채문이 두 왕후에게 청하여 먼저 북문으로 나가게 하고라는 문장이 나온다. 고려 현종 때 도봉사(道峰寺) 근처의 일이었으니 여기 북문을 중흥산성의 북문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산성이 1010년 이전에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고종 19(1232)에는 몽고 장수 살리타이가 한양산성을 함락시킨 다음 처인성에 갔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돼 있고, 고려 말 우왕 14(1388)에는 최영이 개경의 방리군(坊里軍)을 동원해 삼각산 중흥산성을 수축(修築)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중흥산성의 위치

1596년 이덕형의 장계를 보면 신이 초하룻날 도성을 나가 중흥동 못 미쳐 촌가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동구에 이르러 서북쪽 외성을 살펴 보았습니다. 삼각봉이 높이 솟아있는 곁에 봉우리 둘이 나란히 서있었는데 성은 마지막 봉우리 허리에서 시작해 계곡 입구 옆 언덕에서 끝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쪽 외성은 계곡 암벽에서 시작하여 서남쪽 최고봉에서 끝났습니다. 성에 석문이 있었는바 소위 서문으로서 그 가운데로 길이 나있어 중흥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중략)내성으로 들어가며 보니 거기도 성에 석문이 있었으며 절과의 거리는 수백 보 가량 되었습니다. (하략)라고 적혀 있다. 이 문장을 유추해보면 중흥산성의 위치는 현재의 중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 둘 드러나는 중흥산성의 흔적

중흥산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북한산성의 가치 재조명>에서 김성태 교수는 거란의 1차 입을 겪은 다음 삼각산 일대에 산성을 쌓아 피난에 대비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2013년 노적봉에서, 북장대지가 있는 기린봉과 노적봉 사이의 안부(적석령), 그리고 중흥동 초입의 계곡부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돌로 허튼층쌓기를 하고 틈새를 쐐기돌로 메우는 방식으로 축조한 성벽이 발견되었다.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축성법이다.

같은 해 보국문과 석가봉(칼바위) 치성 사이에서 북한산성 성벽의 기초로 이용된, 고려시대 성벽으로 추정할 수 있는 유구(遺構)가 발견되었다. 중흥산성 서문 남쪽 부분은 증취봉에서 중성문으로 내려오는 능선이었는데 지형이 험준해 지금처럼 계곡 일대만 축성되었으리라 여겨진다.

2017년 증취봉 일대 북한산성 기저부에서 북한산성과 축을 달리하는 고려시대 성벽이 발견되었다. 같은 해 부왕동암문 근처 조선시대 성랑지(城廊址) 아래에서 고려기와편 더미가 발견되었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중흥산성은 중성문 안쪽 중흥동에 쌓인 고려시대 산성으로 둘레가 7.5km이며 내성은 용암문 부근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내린 능선과 남장대지에서 북동북쪽으로 치닫는 능선을 잇는 선이었으리고 추정된다. 이덕형의 장계에서는 동구에 이르러 서북쪽 외성을 보니 삼각봉이 곁에 봉우리 둘이 나란히 서있었다했다. 아울러 성은 미로봉(彌老峰) 허리에서 비롯하여 도성암(道成庵) 위 고개, 석가현을 거친 뒤 문수봉에 이르러 그쳤다고 적고 있다. 이를 도상거리로 계산하면 3.4km로 문헌에 보이는 중흥산성의 길이 9417(2.8km)과 얼추 비슷하다.

의상능선 가사당암문에 도착한 북한산성 시민학교 참가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