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북한산성…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찾아서

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 (1) 연재를 시작하며

2020-12-15     유경종 기자

북한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도전
시민들의 이해·관심 모으려면 ‘이야기’로 풀어야

수많은 문화유산·인물 품은 역사의 창고이자
과거-현재 가슴으로 이어주는 고마운 연결고리

만경봉에서 바라본 백운봉과 인수봉. 북한산의 장엄한 바위 봉우리들은 먼 옛날부터 이 땅에 전승되어온 산신신앙, 거석신앙의 대상이었다. [사진=이재용 사진작가]

[고양신문] 고양의 자랑스러운 역사유산인 ‘북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다. 세계유산 등재는 행정이나 절차만으로 풀어낼 과제가 아니다. 북한산과 북한산성을 사랑하는 이웃들의 이해와 관심, 애정과 열망이 모아질 때 비로소 세계인에게 선보일 문화유산으로서의 위상이 마련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이 품은 방대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시대와 인물들을 딱딱한 자료집이 아닌, 누구에게나 소통 가능한 ‘이야기’로 풀어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다. 

옛사람과 지금 사람 이어주는 ‘상징경관’

일찍부터 북한산은 한반도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신령한 산(靈山)이었다. 특히 한강이라는 큰 물줄기가 만들어준 넓고 비옥한 평야지대에 터를 잡았던 선조들에게 북한산은 뿌리 깊은 산신 신앙, 거석 신앙의 중심이었다. 도내동 비탈에서 돌도끼를 만들고 파주 야산 기슭에서 고인돌을 세우던 선사시대 선조들도, 5000년 전 지금의 대화동 들녘에서 벼농사를 시작했던 농경시대 선조들도 해가 뜨는 동쪽 하늘 아래 기운차게 우뚝 솟아 있는 북한산을 바라보며 풍요와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빌딩과 아파트가 시야를 가려 존재감을 잊고 살 때가 많지만 자유로를 달리다가, 전철에 앉아 지축역을 지나다가, 아니면 덕양산이나 정발산을 오르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면 어김없이 장엄한 자태의 ‘그 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주 오래 전 선조들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 산’은 오직 북한산 하나뿐이다. 독보적 상징경관(象徵景觀)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있는 북한산은 옛사람과 지금 사람을 이어주는 정서적 접점이다.

하늘의 정기 내려받는 신령한 산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산신신앙과 거석신앙은 다양한 형태의 산신제사로 이어졌고,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한 차원 높은 종교 형식으로 성숙된다. 북한산의 신령한 산세와 기운찬 바위들은 제도화된 종교마저 넉넉히 품어냈다. 특히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성에서 한 눈에 조망되는 북한산에 커다란 사찰들이 세워지며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오늘날까지도 불교의 중흥조로 숭앙받는 태고 보우 선사가 북한산 중흥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상을 기원했던 모습은 고려 말 북한산 불교문화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유교를 통치이념 삼아 건국한 조선에서는 불교를 배척했지만, 백성들의 삶 속 깊이 각인된 종교적 심성마저 잠재울 순 없었다. 조선시대에도 북한산은 민간신앙과 불교가 맥을 잇는 공간이었다.

임진년과 병자년에 시작된 양대 전란을 겪는 과정에서 이 땅의 불교는 ‘호국 불교’라는 새 옷을 입게 된다. 승려이자 군인이라는 이중 신분을 감내하면서 백성으로서의 권리를 획득한 불교는 북한산성 축성, 그리고 축성 이후의 산성 방어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한다.   

서쪽 기슭에서 북한산에 오르는 관문인 대서문. 1711년 숙종이 쌓은 북한산성에는 대서문을 비롯해 총 16개의 성문(중성 포함)이 있다. [사진=이재용 사진작가]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심지

국가의 성쇠와 관련해서도 북한산은 중요한 상징경관이었다. 고대국가의 형성기에 한반도의 중심, 한강 유역의 넓고 풍요로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북한산을 반드시 손 안에 넣어야 했다. ‘온조가 부아악(북한산)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폈다’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기록은 문헌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북한산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후 백제와 고구려 신라는 번갈아가며 북한산을 중심으로 한 중원의 패권을 다퉜고, 최종적 승자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이는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운 신라 진흥왕이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 도선국사는 임진강 건너 북한산이 조망되는 개성에 자리를 잡았지만, 500년 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무학대사는 북한산을 등에 업고 한강을 품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지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산신 신앙의 결정체인 북한산을 왕조의 권위와 정통성을 보증해주는 배후 경관으로 배치한다. 이러한 상징경관의 차용은 유교이념만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건국 프로젝트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해주었다. 비로소 북한산이 이 땅의 명실상부한 진산(鎭山)이 되었고, 그 역사는 6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선조들의 삶과 만나는 창

한양의 진산인 북한산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살았던 이들의 생각과 정서를 들여다보기에 너무나도 훌륭한 창이다.

도읍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천하 절경 봉우리와 맑은 골짜기를 품은 산이 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커다란 축복이었다. 야망을 가진 이들은 북한산을 찾아 웅지를 세웠고, 시인과 묵객들은 북한산의 풍류와 아름다움을 시와 글로 남겼다. 현실에 좌절하거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도 북한산에서 마음과 생각을 가다듬었다.

매월당 김시습, 성호 이익, 청장관 이덕무,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의 문장과 유산기,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등 북한산이 낳은 선조들의 흔적들은 헤아릴 수 없다. 연재를 통해 한 명 한 명 만나보자.

조선이 양반과 선비들만의 나라일 리 있을까. 북한산을 바라보며 살았던 도성과 고양 땅 평민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기쁨과 눈물을 헤아려 보는 것도 이번 연재에서 풀어내야 할 의미 있는 과제이리라.   

조선의 명운 보여주는 북한산성

북한산이 사람과 만나는 창이라면, 북한산성은 조선이라는 나라 전체의 역사와 운명을 하나의 맥락에서 거시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축약도다. 숙종 37년(1711년)에 축성된 북한산성은 조선 후기 국가의 명운을 건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북한산성의 탄생을 이해하려면 조선 개국 초기부터의 국방어체제 공부해야 하고, 시대에 따라 변모된 성곽축조기법을 살펴야 한다. 무엇보다도 양대 전란, 그리고 당대의 수퍼파워인 청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조선의 국가방어 시스템에 어떤 결단이 요청됐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또한 길고도 오랜 시간이 걸렸던 북한산성 축성 논의는 조선 조정의 군신관계와 당파정치, 의사결정과정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본격적인 축성 과정은 조선의 사회 경제적 역량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축성 이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북한산성이 만들어지고 제대로 관리됐던 시절은 숙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채 100년이 되지 않은 기간이었다. 이후 조선은 국가적 역량을 점차 잃어갔고, 북한산성 역시 왕실과 도성민의 운명을 함께 지켜 줄 최후 보장처로서의 위상이 소진되고 말았다. 조선이라는 등불이 꺼져가는 시기 북한산성의 처참한 몰락을 보여주는 기록들은 차마 들여다보기에도 가슴이 아프다. 연재를 통해 산성의 운명이 한 국가의 운명과 명확히 보조를 맞추는 모습을 담담히 따라가 보자.      

중성문과 노적봉 [사진=이재용 사진작가]

모든 것을 바꿔놓은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맞이한 근대의 변화들은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북한산성 행궁을 비롯해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왕조의 흔적들이 무너져 내렸고, 차마 밟고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성스러운 봉우리들마다 등산로가 개척되고 쇠줄이 박혔다. 국가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곽은 나들이객을 맞는 관광지가 됐고, 조선 삼군문 장수들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았던 산성 안 마을 사람들은 음식장사를 하고 살구열매를 팔며 생계를 꾸려야 했다.

한편으로는 근대적 변화들이 주체적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3·1운동의 역사가 북한산 가장 높은 봉우리 백운봉 바위에 새겨지기도 했고, 서구에서 유입된 근대적 산악등정(알피니즘)이 처음 시작된 곳도 당연히 북한산이었다. 오늘날 세계 최정상 수준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에너지 넘치는 알피니스트들은 예외 없이 북한산의 암봉들이 낳은 아들딸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이야기 만들어지는 산

해방 이후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역사 역시 역시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경제부흥이라는 시대 변화를 거울처럼 차곡차곡 비춰준다.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한 후 대서문까지 큰길이 만들어졌고, 박정희 정권은 도선사까지 불도저로 길을 냈다. 이제 북한산은 각박하고 숨가쁜 도시생활에 지친 서울사람들에게 주말의 휴식을 제공하는 허파가 됐다. 등산과 암벽등반, 하이킹이라는 용어가 북한산을 중심으로 정착되고 확산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북한산이 가진 역사의 가치는 북한산에 깃들어 사는 동식물들의 생존권과 함께 뒷전으로 내쳐졌다. 

과도한 개발과 이용에 자기반성이 일어나고, 새로운 관점으로 북한산을 바라보게 된 건 80년대 중반부터였다. 1984년에 북한산이 국립공원에 지정되며 북한산과 북한산성의 역사문화자원이 조명되고, 생태와 자연을 지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북한산을 관통하는 케이블카 건설을 시민들의 반대로 막아낸 것도 그 무렵이었다.

대량의 실업사태를 촉발한 90년대 후반의 IMF 사태는 이전과는 또 다른 등산문화를 폭발시켰고,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까지 일명 ‘송추방위’로 불렸던 단기사병부대가 북한산을 무대로 활약하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북한산과 북한산성에 산재한 문화재들에 대한 정밀한 조사와 연구가 이어졌고, 동장대와 산영루, 중흥사 등 소중한 문화재들이 하나하나 복원돼 북한산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있다.

최근에는 등산 문화도 다양하게 분화돼 젊은 세대들은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패션과 방식으로 북한산 나들이를 즐기고 있다. 이처럼 북한산과 북한산성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다. 연재에서 오늘의 이야기들도 담아보았으면 좋겠다.

더 많은 이야기 들여다보고 상상하고

특정한 ‘시대’라는 명명은 수많은 요소들의 복합적 작용을 인위적으로 갈무리한 추상적 개념이다. 사실 어느 시대를 살았건, 그의 신분이 어떠했건 각자의 삶에는 저마다의 고유성이 있다. 어느 시대의 북한산은 어떠했다고, 한두 가지의 장면으로 규정하는 게 쉽지 않은 이유다. 가능한 한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여다보고, 등장하는 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성을 상상하고, 그들이 꿈꾸었을 소망과 감내했을 고통을 짐작해 보도록 하자. 그 상상과 짐작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돌아보는 안목을 길러주길 기대하며 말이다. 첫 발 떼는 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 여정에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동행해 주시기를 청한다.

노고산 너머로 바라본 북한산의 일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북한산은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강 하구 평야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상서롭게 자리한 상징경관이다. [사진=이재용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