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의 기억, 마을역사로 남기다
살아있는 향토 역사서, 한영철 장항1동 주민자치위원장
일산동구 장항1동 행정복지센터를 찾아가던 날, 비닐하우스와 공장이 밀집한 장항벌판에서 내비게이션이 "도착했다"며 안내를 종료했다. 놀라서 목을 쭈욱 빼고 태극기 휘날리는 건물을 찾아 겨우 도착했다. 이날, 장항1동이 신도시가 아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장항1동은 섬말다리부터 킨텍스 원시티까지, 자유로와 나란한, 굉장히 길고 넓은 면적의 행정동이다. 인구는 최근까지 3000명 선이었다가 원시티에 입주가 시작되며 지금은 1만3000명으로 늘었다. 앞으로 고양장항공공주택단지가 들어설 곳이기도 하다. 장항1동 주민자치위원회가 지난해 연말 『황무지에서 옥토로 장항1동 마을이야기』를 발행했다(본지 1500호 ‘장항1동, ‘황무지에서 옥토로 장항1동 마을이야기’ 발간’ 참고). 한영철(63세) 주민자치위원장을 만나보았다.
개발로 사라질 마을 기록
“주민센터 기준으로 길 건너편이 모두 개발될 거라서 마을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자는 논의가 2019년부터 시작됐고 2020년 말에 책자가 나오게 됐어요. 뜻 깊은 작업이었지요”라는 한 위원장.
책자에는 고양장항공공주택단지와 고양방송영상밸리 등의 개발을 앞두고 크게 변화할 장항1동의 현재 모습과 마을의 유래와 역사, 주민들의 소소한 마을살이 이야기 등이 옛사진과 함께 상세히 기록됐다. 1990년 한강 둑이 무너지는 큰 수해를 입어 대다수 가정에 사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멀리 이사간 지인들까지 연락해 최대한 자료를 담았다. 그만큼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의미있는 책자다.
4대째 고양에 사는 토박이
한영철 위원장은 4대째 섬말다리에 거주하는 고양 토박이다. 백마초, 능곡중고등학교 출신인 그에게 고양은 뿌리이며 추억의 공간이고 현재 삶의 터전이다. 그만큼 지역에 애정도 많고 고양시 곳곳의 일들을 기억하는, 살아있는 향토역사서이다.
“멀리 놀러갔다가도 한강다리 건너서 동네 다가오면 그렇게 마음이 좋아요. 푸근하다고 할까?”
섬말다리 집에서 백마초까지 5㎞, 어린 걸음으로 등교에만 1시간이 걸렸다. 장항동에는 수로를 비롯해 여기저기로 물길이 있어서 학교가 빤히 보이는 곳에 사는 아이들도 물길을 피해 빙 돌아서 1시간 이상 걸어 등교하곤 했단다. 그는 “그때랑 비교하면 천지개벽이 일어난 셈”이라고 표현한다. 앞으로 공공주택단지가 들어서면 또 한 번 천지개벽이 일어날 판이다.
한영철 위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 동네 사람들은 물과 친하게 살았다. 물이 빠지면 한강 복판에 있던 사미섬까지 잘박잘박 걸어가서 갈대를 베어다 땔감으로 썼고, 강에서 물고기와 재첩을 잡았다.
“섬말다리 살던 애들은 초등학교 입학 전이면 누구나 수영을 마스터 했어요. 한강과 샛강에서 재첩 잡고 놀면서 익힌 생활형 수영이죠. 개울에는 물고기가 엄청 많아서 손으로 잡곤 했어요. 그때 재첩이 그렇게 실하고 맛있었는데….”
다시 맛보지 못할 그 시절의 맛이 떠올랐는지 그의 눈빛에 언뜻 그리움이 스치는 듯했다.
강은 마을사람들에게 삶의 일부였지만 두 얼굴의 괴수처럼 무섭게 변하기도 했다. 1990년 9월 대홍수로 대보둑이 무너져 온 마을을 집어삼켰다. 한 위원장은 “그 전날 한강에 나가보니 물이 둑 언저리까지 찰랑찰랑해요. 안되겠다 싶었죠. 당시에는 능곡에 나가 살 때라서 부모님을 능곡집으로 모셔왔어요. 다음날 집에 가려고 나섰더니 이미 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있었죠.”
물이 빠진 마을은 처참했다. 그때의 모습과 상황은 마을 책자에 고스란히 담겼다.
물 흐르듯 당연했던 마을일
1991년도에 동(洞)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통장을 시작했다. 주민자치위원도 10여년하다가 위원장이 되었고, 마을에서 체육회 활동도 했다. “동네일 하는 것이 그냥 당연했다”는 한영철 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일찌감치 시민의식에 눈을 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섬말다리 거주 학생들 중심으로 ‘백신학생회’가 조직됐다. 그의 1년 선배였던 능곡고 학생 유만형과 용산고 학생 허현회가 주축이었다. 주말이면 모여서 독서토론, 공부, 마을정화활동을 했고, 마을어른들까지 모아 축구대회도 열었다.
“당시에 고양시에서 이런 자발적인 학생활동은 없었다”는 한 위원장. 어쩌면 그 시절부터 공동체의식, 마을활동 등이 그의 뇌리에 자리잡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축구를 좋아해서 매일 아침 축구를 한다. 1977년 창단된 ‘백마축구회’ 회원으로 주말마다, 2006년에는 직접 ‘노고산 축구회’를 창단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1시간씩 공을 찬다. 고양시축구협회 자문위원이기도 할 만큼 그의 축구사랑은 남다르다.
주민간의 융화에 최선 다하려
장항1동은 면적은 넓고, 주간 인구는 2만~3만 명 될 만큼 많고 야간과 주말 인구는 적다. 주차문제가 심각하고 도시, 비닐하우스, 논과 밭, 창고형 공장, 그린벨트가 섞여있어 주민자치위원회가 나서야할 마을 현안도 많다. 최근 원시티 주민들이 입주하면서 주민자치위원회에도 새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원시티에서 4명의 신규 위원이 선발되었고, 올해 2명 더 뽑을 예정이다. 위원회에서는 그동안 하지 않았던 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도농복합마을은 주민간의 융화가 어렵다고들 한다. 아파트 입주자들이 유입되면 ‘토박이’ 대 ‘외지인’의 구도가 되기 십상이다.
한영철 위원장은 "임기 동안 기존 주민과 아파트 입주민의 융화에 주안점을 두고, 20명 위원들과 함께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많이 찾아서 마을 전체가 어우러지도록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마을소식지도 발행해 주민들의 화합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