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한가운데에서 ‘다시 일어서는’ 천년의 꿈

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9) - 동명스님이 들려주는 중흥사 이야기(상)

2021-02-19     유경종 기자

신생국 고려의 부흥 염원하며 세워진 사찰
선불교 고승 태고 보우국사가의 흔적 곳곳
기울어가는 고려 되살리려 ‘한양 천도’ 제안

중흥사서 공부하다 출가 결심한 매월당 김시습
양대 전란 활약으로 얻어낸 조선 불교의 위상
북한산성 축조의 주역 승군조직의 총 지휘소

북한산 중흥사의 유서 깊은 역사 이야기를 들려준 동명스님. 현재 중앙승가대학 승가학연구원 비구수행관장을 맡고 있다.

[고양신문] 북한산성 안에 자리한 10여 개의 사찰 중 가장 풍부한 역사적 스토리를 품은 사찰을 꼽으라면 단연 중흥사(重興寺)가 아닐까. 고려 건국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흥사는 고려 말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中興祖)로 추앙받는 태고 보우국사가 주석했던 곳이고, 북한산성이 만들어진 조선 숙종 때에는 산성 축조의 주역이었던 승군(僧軍)들을 통솔하는 지휘본부 역할을 했던 사찰이었다.

이렇듯 깊은 역사적 이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중흥사라는 이름이 일반인에 낯선 이유는 뭘까. 안타깝게도 조선의 국운이 기울며 중흥사 역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연이은 자연재해가 덮치며 일제강점기에 추춧돌과 기왓조각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한 세기가 흐르는 동안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던 중흥사 터에 몇 해 전부터 새로운 법당과 누대, 요사채가 차례로 세워졌다. 21세기 중흥사 중창불사를 이끈 장본인 중 한명이 바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중흥사 주지로 재임했던 동명스님이다.
현재 중앙승가대학 승가학연구원 비구수행관장을 맡고 있는 동명스님이 오래간만에 중흥사에 들른다는 소식을 듣고 만남을 청했다. 중흥사 전륜전(轉輪殿)에서 진행된 인터뷰 내내 동명스님이 기자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채워줬다. 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 아홉 번째 이야기는 동명스님이 차향(茶香)과 함께 들려준 북한산 중흥사 이야기다.

100년 동안 잊혀졌던 북한산 중흥사가 다시 중창되며 새로운 역사를 열고 있다. 사진은 중흥사 대웅전.

▮중흥사는 한마디로 어떤 사찰인가.

역사적으로 한강유역과 북한산을 차지한 세력이 한반도 전체의 주인이 됐다. 고려와 조선시대 역사를 살펴봐도 북한산 지역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절에는 국운도 융성했고, 북한산이 역사에서 잊히면 국가의 운명도 기울어지곤 했다.
북한산의 중심에 북한산성이 있고, 북한산성의 중심 지역이 바로 이곳 중흥사 주변이다. 지형적로 산성 안에서 가장 넓은 터를 가지고 있고, 계곡물이 흐르고, 산성 어느 곳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여러 사찰과 창고가 자리했고, 계곡에는 산영루가 세워졌고, 조금만 올라가면 북한산 행궁(行宮)이 나타난다. 지금은 북한동이라고 부르지만, 이곳의 원래 이름은 중흥동(重興洞)이다. 중흥사가 자리하고 있는 골짜기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중흥사는 언제 창건됐나.

대개 고려의 건국과 함께 세워졌으리라 추정하지만, 사실 정확한 창건 연대를 말해주는 기록이 없다. 다만 역사를 추측할 수 있는 유물로 중흥사 금고(金鼓, 쇠북)가 전해오는데, 금고 측면 명문에 1103년에 제작됐다고 적혀있다. 적어도 중흥사는 그 이전, 고려 초기에 창건됐다는 걸 말해준다.
고려 개국과 함께 세워진 주요 사찰 중 서경(평양)의 중흥사가 있다. 북한산 중흥사와 이름이 똑같다. 개경을 수도로 삼은 고려는 북쪽에 서경을, 남쪽에 남경(한양)을 두어 도성 방어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름에 흥(興)자가 들어가면 대개 호국사찰이다. 여기에 거듭 중(重)자가 붙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뤄볼 때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기치를 내건 태조 왕건이 나라가 다시 부흥하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서경 중흥사와 남경(북한산) 중흥사를 나란히 세운 게 아닐까 짐작한다.

중흥사 만세루. 북한산성을 쌓은 승군들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의승군기념관'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창건 이후 주목할 만한 역사는.

건국 이후 고려는 개경과 서경, 이른바 양경(兩京)의 귀족세력 중심으로 역사가 전개된다. 아쉽게도 북한산 중흥사는 고려시대 내내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하다가, 1341년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국사가 주지로 주석하면서부터 중흥사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고려는 물론 중국 원나라까지 명성이 높았던 보우국사는 공민왕으로부터 국사로 추대를 받는다. 그는 기울어가는 고려의 국운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먼저 아홉 개의 파벌(구산선문)로 갈라진 불교계를 하나로 통합하려 했다. 나아가 기운이 다한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지 한양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공민왕에게 전하기도 한다. 서경과 개경의 권문세족들이 독점하고 있는 국가의 권력구조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국정의 파트너로 등용하며 상황이 달라진다. 태고 보우는 신돈의 견제를 받아 속리산 법주사에 유폐되기도 하고, 그가 꿈꾸었던 개혁적인 조치들 역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만다.  

▮태고 보우국사의 불교사적 위상은.

태고 보우는 우리나라 선불교의 종조, 또는 중흥조로 불린다. 선불교는 스승의 깨달음과 법통이 제자에게로 이어진다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리 선불교의 주류는 간화선을 중심으로 하는 임제종 전통을 잇고 있는데, 태고 보우국사는 중흥사에서 깨침을 얻은 후 중국으로 건너가  임제선사의 18대 제자인 석옥 청공스님으로부터 법통의 계승자로 인정을 받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보우스님이 중흥사 태고암에서 쓴 시 ‘태고암가’를 보여드렸더니, 석옥 청공스님이 “아, 불법이 동방으로 가는구나”라고 감탄하며 그 자리에서 붓을 들어 답시를 적어주었고, 전법의 상징으로 가사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태고 보우의 법통이 목암 찬영스님, 환암 혼수스님, 조선시대의 벽계 정심스님, 벽송 지엄스님 등을 거쳐 서산 휴정스님으로 계승된다. 이후 우리나라 불교는 모두 다 서산 휴정스님으로부터 이어온 계보라 할 수 있다.

태고사 마당에 자리한 원증국사탑비각.

▮태고 보우스님의 흔적을 만나려면.

보우 스님은 중흥사 동쪽 장군봉 언덕에 태고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짓고 수행하셨고, 그곳에서 득도의 높은 경지를 담아낸 ‘태고암가(太古庵家)’를 지으셨다. 오늘날 태고암 자리에는 태고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 태고 보우스님을 기리는 소중한 문화재 2점이 있다. 하나는  법당 옆 비각에 모셔진 ‘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 보물 제611호)’이다. ‘원증국사’는 보우 스님 입적 후 임금이 내린 시호이고, 비석에 적힌 글은 고려 말 최고의 문장가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썼다. 태고사 뒤편으로 올라가면 보우스님의 사리를 모신 승탑인 ‘태고사원증국사탑(太古寺圓證國師塔, 보물 제749호)’을 만나볼 수 있다.

태고사 언덕 위에 자리한 원증국사탑.

▮조선 개국 이후 중흥사의 역사를 들려 달라.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중흥사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찰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과 사대부들의 문집에서 북한산 중흥사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특히 한양 명문가 인사들이 북한산의 사찰에서 머물며 과거 공부를 하기도 했다.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도 그 중 하나였는데, 그가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전해 듣고 읽던 책을 불살라버리고 출가를 결심한 곳이 바로 중흥사였다.

▮유교적 출세를 꿈꾼 이들이 사찰에서 공부를 했다는 게 흥미롭다.

비록 조선은 유교국가였지만, 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다양한 이유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우선 민중들의 뿌리 깊은 심성 속에 여전히 불교가 자리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왕실 내부의 종교 역시 불교였다. 태조 이성계도 불교를 섬겼고,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자마자 불교 경전의 언해본이라 할 수 있는 『월인천강지곡』과 석가모니의 전기인 『석보상절』을 저술토록 했다. 세조는 아예 궁 안에 내불당을 만들 정도로 불심에 의탁했다. 중흥사만 보더라도 전륜전과 만세루 현판을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썼다.
사대부들도 드러내놓고 불교를 숭배하진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몰래 불교를 공부하고 스님들과 교유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도 불교는 국가의 정치이념과는 별도로 종교로서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명스님과의 인터뷰가 진행된 중흥사 전륜전.

▮조선 초기 극심한 억압을 받았던 불교가 나름대로 위상을 회복하게 된 계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 이후라고 들었다.

맞는 말이다.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는 전란 속에서 승려들이 승군(僧軍)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곳곳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승·의병전투 외에도 이순신 장군 부대와 권율장군 부대에서도 승군들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듯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조선 승군을 통솔한 인물이 바로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이고, 그를 계승한 분이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이었다.
위기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한 공로를 인정받은 서산대사가 입적 후 의관이 해남 대흥사로 전해졌고, 정조임금의 명에 의해 서산대사를 기리는 표충사(表忠祠)가 세워지고 국가 차원의 제례가 올려졌다. 양란 이후 조선 불교의 위상이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불자와 승군,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승려가 군인이 된다는 것이 교리에 맞는 것인지 물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서산 휴정스님도 이 점을 깊이 고민하셨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으로 내몰리는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일원으로서 불교의 위상을 위해서도 승군 참여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휴정의 제자들 중에도 의견이 나뉘어 일부는 승병에 참여하지 않고 구도에 정진하기도 한다. 휴정 스님 역시 자신의 선불교 법통과 종교적 권력을 각각 다른 제자가 나누어 계승토록 했다. 
양란과 승군, 그리고 조선 중기 불교 위상의 변화를 설명한 이유는, 이러한 배경을 이해해야 북한산성 축조에서 활약한 승군들, 그리고 그들을 총지휘한 팔도도총섭 성능스님, 그리고 그가 머물렀던 중흥사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명스님 인터뷰 하편은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중흥사 마당에서 조망되는 북한산의 푸근한 능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