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축성 주역 ‘승군’... 그 중심에 중흥사가 있었다

스토리텔링 북한산·북한산성(10) - 동명스님이 들려주는 중흥사 이야기(하)

2021-03-03     유경종 기자

북한산 13개 승영사찰 지휘본부 ‘중흥사’
산성 축조 총지휘한 팔도도총섭 성능대사
숙종·영조, 북한산성 행차하며 중흥사 찾아

일제 강점과 자연재해... 허망하게 몰락
옛 모습 따라 재건, 새로운 역사 시작
자연·역사·문화 향유하는 템플스테이 ‘인기’

화재와 홍수로 무너진 지 100여 년 만에 중건된 북한산 중흥사. 대웅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팔도도총섭이 머물던 자리다.

[고양신문] 북한산 중흥사에서 자리를 함께한 동명스님(중앙승가대학 승가학연구원 비구수행관장) 인터뷰 두 번째 시간이다. 앞선 인터뷰에서 동명스님은 고려 초 창건한 중흥사의 유서 깊은 역사와 태고 보우국사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어 불교가 억압받던 조선시대에도 중흥사는 북한산의 중심사찰로서의 위상을 이어왔다는 사실도 짚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북한산성 축조 과정과 이후의 조선 역사에서 중흥사가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지를 동명스님의 목소리로 들어보자.

중흥사는 북한산성 축성과 함께 새로운 역할과 위상을 부여받는다. 우선, 북한산성은 어떤 배경에서 축조됐나.

조선은 개국 초부터 북한산에 수도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북한산 일대 산성 축조를 염원했다. 하지만 정작 북한산성이 만들어진 것은 숙종 38, 그러니까 건국 이후 300여 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서다. 우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얻은 역사적 교훈이 북한산성 축조의 당위성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어줬다. 기존의 남한산성과 강화성으로는 왕조를 수호하는 데 한계가 명확하다는 사실이 뼈아픈 체험으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특히 남한산성에서 버티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을 하고 머리를 조아린 사태는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의 치욕이었다.

하지만 산성 축조는 전란 후 곧바로 진행되지 못했는데.

전란의 폐해를 딛고 강력한 왕권 회복에 주력했던 숙종 임금은 즉위 초부터 북한산성 축조를 지속적으로 모색했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외부적 요인, 다시 말해 청나라의 간섭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군사적으로 강국이 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청나라는 조선 땅에 새로운 산성 축조를 금지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다. 숙종 37년 무렵, 왜구들이 조선은 물론, 황해를 건너 청나라 해안까지 출몰하며 피해를 입히는 일이 빈번해지자 청나라로부터 산성을 쌓아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도 좋다는 규제 완화조치가 내려온 것이다. 조선이 왜구의 방어선 역할을 하려면 자체무장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숙종 임금은 그동안 절치부심 기회만 엿보고 있던 북한산성 축조를 과감하게 밀어 붙인 것이다.

중흥사 중창불사를 이끈 동명스님. 현재 중앙승가대학 승가학연구원 비구수행관장을 맡고 있다.

산성 축조를 대비한 철저한 사전 준비가 있었다고 들었다.

맞다. 새로운 산성은 만들지 못하지만, 기존의 산성을 보강하는 일은 허용됐기 때문에 숙종은 한양 주변의 산성과 읍성들을 두루 보강하며 산성 축조의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덕분에 북한산성 축조가 시작된 후 불과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북한산성 축조를 마무리했다. 청나라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축성을 끝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축성 시간 단축을 위한 노하우가 총동원됐다. 산성의 주 재료인 화강암은 가까이 북한산의 계곡에서 구했고, 암봉 구간은 천연암벽을 이용하고 성곽과 여장을 적절히 배치하며 지형지물을 철저히 활용했다. 또한 각 분야의 기술자들과 도성민들의 부역을 총동원했다.

무엇보다도 산세에 익숙하고, 풍부한 경험에 조직력까지 갖춘 스님들을 북한산성 축조의 한 축으로 삼았기에 최단시간만에 북한산성 축조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처럼 북한산성은 조선의 산성 축성기술과 국가적 역량이 집결된 걸작이라 말할 수 있다.

북한산성 축성에 참가한 스님들의 중심사찰이 바로 이곳 중흥사였다는데.

그렇다. 당시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차출된 승려들이 북한산으로 집결했는데, 그들을 통솔하는 지휘관이 바로 팔도도총섭이라는 직책이었고, 팔도도총섭이 머물며 집무를 보던 곳이 바로 중흥사였다. 말하자면 북한산성 축조의 현장지휘본부였던 셈이다.

북한산성 축성 이후에도 중흥사의 중요성은 더욱 강고해졌다. 관군만으로는 북한산성을 지키는 데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승군(僧軍)이 주둔하는 13개의 승영사찰(僧營寺刹)을 산성 안에 두었다. 중흥사를 비롯해 보국사, 보광사, 원각사, 태고사, 봉성암, 진국사(노적사) 서암사, 국녕사. 부황사 등이다. 당시 중흥사의 모습은 136칸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였다.

북한산성 승군을 총 지휘하는 팔도도총섭이 머물렀던 공간이 중흥사 대웅전 바로 옆 건물이다. 현재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예전 그 터 위에, 예전 그 규모로 건물을 다시 세워놓았다.

의상능선에서 만난 북한산성 여장.

초대 팔도도총섭으로 활약한 성능대사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초대 팔도도총섭을 맡은 계파 성능대사는 북한산성 축성과 관리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장본인이다. 원래 전남 구례 화엄사 스님이셨는데, 그곳에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대 불전인 화엄사 각황전(국보 제67)’을 중건하는 업적을 남겼다. 각황전은 황제를 깨닫게 한다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왕실의 보시를 받아 지어진 불전이다. 성능대사는 당대에도 명성이 아주 높아서 대사의 영험한 능력을 말해주는, 숙종 임금의 공주와 연관된 전설이 대중들의 입에 회자되기도 했다. 숙종 임금이 당시 최고의 인재인 성능대사에게 불교계 최고의 직책(팔도도총섭)을 임명하고, 북한산성 축조의 대업을 맡긴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성능대사는 중흥사에 얼마나 머물렀나.

1711년에 중흥사로 와서 1745년까지 35년을 중흥사에 몸담았으니, 이곳에서 청춘을 다 보낸 셈이다. 노년의 성능대사가 팔도도총섭 자리를 후임에게 물려주고 떠나가기 전에 펴낸 책이 바로 북한지(北漢誌). 이 책에는 북한산성의 축조에 대한 기록, 그리고 관리 매뉴얼이 상세하게 정리돼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산의 봉우리와 산성의 구조, 산성 안 건물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그려 넣은 북한도(北漢圖)’라는 지도가 수록돼 있어 북한산성을 연구하는 후손들에게 너무도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북한산성이 6개월만에 완공될 수 있었던 데에는 성능대사를 중심으로 한 승군들의 역할이 크게 기여했다.

축성 이후 북한산성은 어떻게 관리됐나.

북한산성 완공 이듬해인 1712, 숙종 임금이 직접 행차를 해 산성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감격에 찬 시를 남긴다. 아울러 산성 방어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중흥동 일대를 이중으로 보호하는 중성(重城) 축성을 지시하기도 한다. 이후 1772년 영조 임금도 북한산성에 행차를 해 60년 전 세자 신분으로 부왕 숙종 임금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 날을 회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축성 이후 전란이나 외침이 없는 세월이 길어지며 자연스럽게 북한산성은 조정과 왕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산성의 승군과 승영사찰은 1894년 갑오경장까지 유지돼 왔고, 북한산성 역시 스님들에 의해 관리되고 지켜졌다. 그 중심에는 여전히 중흥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중흥사는 왜 몰락했을까.

중흥사는 스스로의 이름처럼 조선이라는 나라와 운명을 같이 했다. 19세기 이후 조선은 국력이 점점 기울어갔다. 외세가 밀려오며 떠밀리듯 나라를 개방해야 했던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북한산성의 승군이 폐지된다. 승영사찰에 주둔하던 많은 스님들이 떠나고, 국가의 관리와 지원이 끊긴 사찰들은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승군 해체는 결국 대한제국 군대 해산과 일제 조선 강점의 서막이었다.

승군이 해체된 후 일제는 조선의 성곽과 행궁, 그리고 승군이 주둔했던 북한산성 일대를 요주의 지역으로 보고 경계를 강화했다. 그러다가 1905년 큰 불이 나 건물이 한 두 채만 남고 소실된다. 이후 팔도도총섭이 머물던 자리에 일본 헌병대가 건물을 지어 남아있는 시설과 군사적 흔적들을 정리한다.

결국 1915년 대홍수에 중흥사는 완전히 흔적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어 1925년 을축년 대홍수에는 행궁을 비롯해 북한산성의 주요 시설들도 폐허가 된다. 국권이 상실된 일제 강점기에 중흥사와 북한산성 행궁이 차례로 무너진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북한산과 북한산성이 우리 역사와 얼마나 밀접한 상징성을 갖는지를 되새기게 해 준다.

누각이 아름답게 복원된 대성문의 모습.

100년 넘도록 폐허로 잊혀져가던 중흥사가 2010년대 들어 다시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오늘날의 중창불사가 어떻게 시작됐나.

중흥사의 중건은 불교계의 오랜 염원이었다. 특히 조계종 종정(1993~1994)을 지낸 서암스님은 북한산 중흥사가 중흥되어야 불교도 부흥하고 남북통일도 된다면서 태고 보우국사와 계파 성능대사가 주석했던 중흥사를 종단의 성역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격적으로 중흥사 복원 착수를 시작한 분은 도각스님이었다. 도각스님은 개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중흥사 부지를 1990년대에 다시 사들이고, 사찰을 다시 지을 수 있는 행정절차를 마무리했다.

이후 2007년 불광사 회주로 주석하던 벽암 지홍스님이 공사가 중단된 중흥사를 인수해 다시 공사를 시작했고, 2018년 지금의 모습을 완성했다. 벽암 스님을 은사로 모셨던 나는 2012년부터 중흥사에 머물며 중창불사를 총괄했다.

대웅전, 전륜전, 만세루, 요사채 등 복원된 불당들은 고증을 바탕으로 최대한 과거의 모습에 가깝게 만들었다. 다행히 1902, 홍수로 유실되기 전 중흥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가 남아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새로 중창된 중흥사가 어떤 사찰로 자리매김하길 바랐나.

앞서 살펴보았듯, 중흥사는 고려시대 태고 보우국사가 계셨던 선불교의 뿌리와 같은 사찰이자, 조선시대 호국사찰의 거점이었다.

오늘날에는 중흥사에 새로운 역할이 요구된다. 수도권 가까이에 자리한 북한산, 그리고 북한산성의 중심 사찰로서 이제는 많은 방문자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불교를 수양하는 도량일 뿐 아니라 역사를 공부하고, 휴식과 쉼을 얻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새로 지은 만세루에 의승군기념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도 호국불교의 기념하자는 의도에서다.

웅장한 모습으로 중건된 중흥사 만세루.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운영한다고 들었다.

최근 코로나로 잠시 중단됐지만, 중흥사의 역사와 환경에 맞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활기차게 진행됐었다. 오늘날 여러 산사에서 시도하는 템플스테이는 무척 의미 있는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잠시나마 고즈넉한 산사에 들어와 스님들과 똑같이 생활하다보면 들끓었던 마음이 가라앉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 각 사찰마다 제각각 다른 역사 콘텐츠를 더해 소중한 조상들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실제로 템플스테이를 운영해보면 불교신자보다 종교가 없는, 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찾아온다. 휴식과 명상, 그리고 깊이 있는 문화를 찾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북한산성의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북한산은 지형적으로 너무나도 아름다운 산이다. 또한 북한산성은 아주 풍부한 역사적 이야기를 품은 문화유산이다. 중흥사 역시 특정 종교를 넘어 우리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한 역사·문화적 자산이다. 세계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다양하고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세계유산 등재에 앞서 우리 국민들이, 그리고 고양시민들이 먼저 북한산과 북한산성, 그리고 중흥사를 중심으로 한 호국불교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겼으면 한다.

의상능선에서 바라본 북한산 중심 봉우리.
중흥사 대웅전.
북한산성 내 13개 승영사찰 중 하나였던 서암사도 최근 새롭게 중창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