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고양시 청자가마 사적 지정 시급

2021-05-12     이재준 역사연구가

신라 토기 굽던 곳 고려 청자역사 원류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고려 청자요 유적지 모습.

[고양신문] 세계적 자랑인 고려청자. 비색의 하늘색에 감도는 신비한 아름다움은 최고의 명품으로 인정 받고 있다. 상감청자의 정교한 미는 세계 어느 나라 자기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일본에서 천황 훈장까지 받은 한 유명 도예작가는 ‘평생 자기를 굽다 발견한 마지막 결론은 바로 고려청자의 비색이었다’고 술회했다. 그의 집안에 전시 된 천문학적 가격의 작품들을 보면 온통 고려청자를 재현한 자기들뿐이다.

고려청자는 어느 시기에 생겨나 발전한 것일까. 도자기 전문 학자 간에 의견이 엇갈렸으나 지금은 9세기 통일신라 말 중국으로부터의 전래에 이론을 달지 않는 것 같다. 경기지역과 전남 전북지역에서 찾아진 초기 청자가마터를 발굴한 결과,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려 잡게 된 것이다.

원흥동 고려 청자요에서 발견된 유물들. [사진 제공=이재준 역사학자]

전문가들은 중국 저장성 월주요(越州窯)에서 전래 되어 고려 중기이후 화려하게 재창조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지역은 고래로 한반도와 가장 밀접하게 교류가 이어져 온 곳이다. 월주요를 설명한 백과사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절강성(浙江省)의 상우(上虞), 여요(余姚), 영파(寧波) 등지에 있는 도요지(陶窯址). 그 지역이 옛 월주(越州)에 속하므로 월주요라 부른다. 동한대(東漢代)부터 남송대(南宋代)까지 청자 제작지로 유명하다. 초기의 월주요에서 생산된 원시청자를 소위‘고월자(古越磁)’라 하는데, 회유도(灰釉陶)에서 발전된 것이다.

차이나 바이두(百度) 기록에도 월주요가 중국 청자의 발원지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중국 도자기 역사에서 귀한 유물이며 가장 숭고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越州窯:也稱"越窯"。越州窯(越窯)的窯址在浙江省的紹興、上虞、慈谿、餘姚一帶,春秋時期此地是越國的政治、經濟中心。秦統一天下後屬於會稽郡,唐朝時屬越州,故稱為越州窯,簡稱越窯。古越地不僅是我國青瓷的發源地,也是我國瓷器的誕生地。越窯燒造瓷器歷史悠久,早在東漢時期,勤勞智慧的越州人燒出了成熟瓷器,歷經六朝、隋唐和五代時期的蓬勃發展,至宋從未間斷,越窯青瓷在中國陶瓷史上占有重要的地位。越窯青瓷是中國古代瓷器中的珍品,在中國陶瓷發展史上具有極為崇高的地位。

월주요 갑발 [사진 제공=이재준 역사학자]

한반도에서 초기 청자가마터 가운데 가장 시기를 올려 볼 수 있는 유적은 어디일까. 필자는 최근 이은만 전 고양시문화원장의 안내로 함께 덕양구 원흥리 청자가마터(경기도문화재 자료 제64호)를 답사하게 되었다. 이 가마터는 일제 강점기 1937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하던 일본인 노모리켄(野守健)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현재는 유적에 펜스를 치는 등 고양시가 보존조치를 해 놓았으나 아직껏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 가마터가 신라시대부터 토기를 굽던 도요지로서 초기 청자를 생산했던 유례가 많지 않은 중요 유적으로 평가 하고 싶다. 가마 곳곳에는 발굴이 되지 않았어도 토기편, 초기 청자 편과 슬러지, 갑발의 잔해들이 산란하고 있다. 한눈에 봐도 토기 가마터에서 청자 가마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원흥리 가마터와 비슷한 시기 전국에 산재한 유적들은 이미 발굴되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 가마터의 조속한 발굴이 이뤄져 땅속에 잠자는 궁금증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고양시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가꾸어 할 것이다. 왜 이 가마가 그동안 문화재 당국으로부터 소외되었는지 필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주목되는 청자 보상화문 와당

필자에게 가장 큰 관심은 바로 이 곳에서 출토된 청자 와당(瓦當)이었다. 실물은 보지 못했으나 원흥리 가마를 소개한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보상화문(寶相華文) 와당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정돈된 보상화무늬는 무척 아름다웠다. 보상화문이 양각된 청자 와당은 통일신라말~고려초에 유행했던 전형적인 불교 문양이다. 지금까지 통일신라~고려초기의 청자기와가 유물로 출토된 사례가 없다.

평생 기와를 조사, 연구해 온 필자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유적이다. 청자기와를 굽던 곳은 지금의 전남 강진군 대구면 청자가마로 알려져 있어 필자로서는 최대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원흥리 가마에서 출토된 청자와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청자기와다. 궁중이나 왕실사암에나 공급된 옛 기록을 입증하는 중요자료다. 청자와당의 편년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자료인 것이다. 

고양에서 구운 청자기와는 과연 어디에 공납되었을까. 바닷길로 고도 왕도인 개경이었을까, 아니면 귀족들이 경영했던 경기도 일대 사암(寺庵)이었을까.

청자 보상화문 와당 [사진 제공=이재준 역사학자]

수많은 청자편과 갑발 등 유물

4월 말 뜨거운 햇살이 완연한 봄 날씨다. 이은만 회장의 안내로 필자는 가마터를 조심스럽게 답사했다. 현장에서 확인한 자기 파편은 현장 그대로 두면서 유물을 살폈다. 그런데 깜짝 놀란 것은 바로 그릇을 받쳤던 갑발이었다. 이 갑발은 중국 저장성 월주요에서 흔히 나오는 고식의 갑발 그대로였다. 갑발 안에 녹아 응고된 녹청자 모양도 똑같다.

청자 파편은 대부분 색깔이 푸른 빛이 나지 않은 녹자다. 이 색깔도 월주요 자기 그대로 닮고 있다. 일부 자기에서는 점상(點狀)의 응고된 자연 녹유도 보인다. 이는 유약이 아니고 불을 땔 때 소나무에서 나온 자연 유가 아닌가 싶다.

그릇의 굽은 해무리굽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강진에서 나온 넓은 해무리가 아니고 조금은 폭이 좁은 것이 주류를 이룬다. 이를 봐도 강진 가마보다 시기를 올려 볼 수 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생활용 토기류다. 항아리, 단지, 잔 등 종류가 다양하며 큰 그릇도 있다. 필자가 또 놀란 것은 통일신라 이전의 고식인 격자문(格子文) 토기 파편도 나온다는 점이다. 회색이며 그릇의 두께도 얇다. 수량은 작지만 이는 가마 초창 시기를 통일신라 이전으로 올려 봐도 되겠다는 증거물이다. 그렇다면 원흥리 가마는 무려 500~600년 이상을 지속해 온 가마인 셈인가. 발굴을 통하여 시기를 정확히 규명할 필요가 있다.   

가마터에서는 상감청자나 고려 중기 이후 등장하는 음,양각의 비색 순청자 파편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 시기에는 청자생산의 주 근거지가 전남 강진, 부안 지역으로 옮겨진 때문일 것이다. 이날 답사에서는 청자와당의 조각은 수습되지 않았다. 
 이 가마터를 세계문화유산인 서오릉, 서삼릉, 서오릉명릉과 송강 시비공원, 공양왕릉(사적191호), 행주산성, 고봉산 등 유적과 함께 고양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꼽는 이은만 회장은 ‘하루속히 발굴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으로 지정되는 것이 시민들의 염원’이라고 말했다. 고양역사 지킴이 이회장의 염원, 고양시 시민들의 소망이 이뤄지는 날을 학수고대해 본다.

❚ 필자 이재준 : 역사연구가. 전 충청북도 문화재위원. 『충북와전도보』, 『고구려 와전 연구』, 『한국의 폐사』 등 다수의 저서와 ‘백제 와당연구’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