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은퇴생활 -  ‘하얀 손’과 ‘얼룩진 손’

2021-05-17     이규상 건강넷 / 청송주말농장 반장

[고양신문] 세상에 욕망이 들끓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변하는 가격표가 매겨진 물질들이 요동을 치니 거기에 발맞추어 혹은 그보다 더욱더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욕망이 요동을 칩니다. 그 물질들은 부동산, 주식, 암호화폐 등 종류를 달리하면서 사람들을 흔들어 놓고 우리 주위에 바람처럼 불거나 물결처럼 출렁이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러한 물질들을 주로 다루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작년 초 퇴직하여 ‘백수’가 되었습니다. 저는 하얀 손이라는 뜻풀이를 가진 ‘백수’라는 말이 은근히 맘에 듭니다. 원래 백수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1920년대에 직업이 없이 다방에서 노닥거리며 지내던 일군의 사람들을 가리키던 말인 ‘백수건달’의 줄임말 이라는 것입니다. 어원을 통해서 짐작컨대 백수라는 말은 아무래도 노동 혹은 경제생활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노동을 하지 않아서 흙이 묻지 않은 깨끗한 손, 하얀 손을 일컬어 일종의 풍자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백수’라는 말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노동이나 경제생활을 하고 싶으나 사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일종의 잉여적 인간들이라는 뉘앙스를 은근히 풍기면서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백수라는 용어가 요즘 다소 다르게 다가옵니다. 하얀 손은 깨끗한 손입니다. 그 손에는 흙도 없지만 얼룩도 없습니다. 반면 얼룩진 손은 다양한 욕망과 잡다한 이해관계가 배어 있는 손입니다. 그 손의 얼룩은 돈과 핏물과 눈물로 만들어지고, 웃음과 울음과 환호와 좌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시기심과 이기심과 냉철한 계산과 어리석음이 어른거립니다.

우리들은 학교를 마치고 사회·경제생활을 하면서 더 이상 백수 즉 하얀 손이 아닙니다. 모두 얼룩진 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야만 이 힘들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견뎌내는 것이 가능하지요. 백수로 일생을 영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도 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은퇴 이후 맞이하는 이 백수라는 새로운 하얀 손은 반가운 손이기도 합니다. 이해타산과 욕망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손입니다. 세상이 내게 입혀준 색깔과 더러움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손입니다. 즉 그 ‘하얀 손’은 기존의 삶의 질곡과 굴레와 계산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자유의 가능성을 품을 수 있는 손이 됩니다.

근대 이후 인간에 대한 특징적인 정의 중 하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일 것입니다. ‘경제적 인간’으로 번역되는 이 인간은 소위 ‘이해타산적 인간’으로서 근대 이후 인간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나라한 이해관계와 무정한 현금지불”로 상징되는 존재입니다. 저는 은퇴 후 백수 생활을 하면서 이 호모 이코노미쿠스적 정체성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퇴 후 사람들을 만날 때도 가능한 돈에 대한 대화는 거의 기피하였으며, 그런 대화가 주제가 되는 만남이나 모임은 가급적 멀리하였습니다. 돈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한다고 하여, 돈에 대하여 많은 욕망을 가진다고 하여 내 수중에 돈이 쌓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수십 년의 직장생활을 통해 경험하기도 했지요. 자본 혹은 돈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법칙대로 움직이지 개인의 욕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요.

이제 더 이상 자본과 돈의 그 냉혹하고 무자비한 휘두름에 말려들고 싶지 않습니다. 자본과 돈에 의해 내 손이 얼룩지고 내 삶이 부박해지는 것을 용납하기는 싫습니다. 이제 얼룩진 손이 아니라 깨끗한 ‘하얀 손’으로 새로이 세상과 나 자신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그 하얀 손으로 진정한 우정을 쌓고 소박한 나의 물건들을 만들고 경이감으로 가득한 유희를 즐기고 진리를 향한 앎에의 의지를 작동시켜 나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백수로서의 새로운 창조적인 삶을 능동적으로 준비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입니다. 

 “세상에는 이해타산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규상 건강넷 / 청송주말농장 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