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같은 삶을 살고 싶어했던 84년 생애... 이같은 삶에 가장 다가간 ‘고양에서 18년’

‘은자’의 풍모가 짙게 배인 고양에서의 최인훈의 삶

2021-07-24     이병우 기자

23일은 어느덧 최인훈 선생의 3주기를 맞이하는 날이었다. 선생이 영면에 들기까지 18년을 보낸 고양은 사회적 행동보다는 냉정하고 날카로운 관찰과 사유의 문학인으로서 살고자 했던 그의 뜻에 부합했던 곳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고양은 조용하지만 깊게 세상을 관조하는 선생의 ‘은자’적인 풍모가 더 짙게 배인 곳이다. 

『광장』의 작가로만 알려지기에는 선생이 성취한 문학적 지평은 넓었기 때문에, 그리고 선생이 남긴 작품들의 문학적 향기가 쉬이 옅어지지 않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은 여러 갈래로 선생을 추모하고 그리워한다. 선생이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고양시 차원에서도 선생을 추모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재준 고양시장은 최인훈 선생을 기리는 기념도서관을 고양시에 건립하는 사업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고양최인훈도서관추진위원회도 고양시의 이러한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더 깊게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최인훈 선생에 대한 조명은 당연하게도 대개 문학작품에 집중되어 있다. 베일에 가려졌던 최인훈이란 인물은 자연인으로서 어떤 분이였을까 궁금해진다. 이번 호에서는 최인훈 선생 3주기를 맞이하면서 우리가 잘 몰랐던 선생의 면모를 엿보기 위해 아내였던 원영희씨를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는 최인훈 선생의 제자로서 선생의 작품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이인숙 고양최인훈도서관추진위원이 진행했다. 또한 최인훈 선생의 모교인 서울대 법대 후배로서 선생과의 첫만남과 인연, 그리고 선생을 추모하는 글을 보내준 이근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기고도 싣는다. 이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박사이자 현재 대한국제법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최인훈 선생이 18년 동안 화정동 은빛마을에 거주하며 보낸 ‘고양에서의 삶’을 조명해본다. 취재에 선생의 장남인 최윤구 음악평론가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2000년 고양 화정으로 이사 
‘꽃우물’ 마을이름 이뻐해 
흑장미 좋아해 장미축제 챙겨
세속의 영욕을 멀리하고
관조하며 책 읽고 쓰는 삶
고양은 가장 안성맞춤이던 곳  

최인훈 선생이 고양에 정착한 것은 2000년부터였다. 고양으로 이사 올 당시만 해도 선생은 서울예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예대가 있는 안산까지 출퇴근하는 일을 1년 남짓 이어가야 했다. 마침 고양에 살고 있는 제자의 도움으로 출퇴근 시간표를 짜서 차를 얻어 타고 안산까지 오갈 수 있었다. 

선생은 고양으로 이사오기 전 서울 갈현동의 마당 있는 2층 단독주택에 거주했다. 마당도 넓고 나무가 심어진 것이 마음에 들어 아내에게 말하지도 않고 계약한 집이었다. 

그런데 거주하던 집 주위에 차츰 다세대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바로 옆까지 4~5층의 다세대주택이 지어졌다. 어느 때부터 마당이 그늘로 가려졌고 그 다음에는 가족들이 식사를 하는 곳까지 어두컴컴해지자 가족들은 이사를 결정했다. 이사를 결정한 후 처음에는 직장과 가까운 안산에 집을 구할 생각으로 선생은 그곳 아파트를 둘러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파트앞 공원 산책로 맘에 들어 아내와 함께 호수공원 들르기도 
선생이 고양 화정 은빛마을로 이사온 것은 순전히 아내 덕분이었다. 마침 아내의 친구 집들이에 아내가 갔었는데 그곳이 바로 고양 화정이었다. 이곳으로 이사할 장소로 점찍어 뒀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선생도 한번 화정으로 와봤는데 대만족한 것이었다. 

선생은 특히 은빛마을 앞의 공원 주위 산책로를 마음에 들어했다. 지금까지 살았던 서울의 북적북적했던 거리와는 달리 여유롭고 한적하며 녹음이 우거진 그 길은, 비록 마당 없는 아파트로 이사온다 하더라도 그 답답함을 충분히 상쇄하고 남을 만한 매력을 선생에게 주었던 것이다. 화정동 은빛마을 아파트단지에서 은빛공원을 지나 고양시립화정도서관까지의 이 산책로는 최인훈 선생이 집 밖에 있는 그 어느 공간보다 사랑하는 공간이 됐다. 여기에다 선생은 ‘꽃우물’이라는 마을 이름도 예쁘다고 여겼다. 고양으로 이사온 후 최인훈 선생은 은빛공원 주변의 산책로를 아내와 함께, 간혹 기르던 강아지와 함께 거닐었다. 

최인훈 선생은 화정동 은빛마을 5단지를 걸어나와 은빛공원을 지나 고양시립화정도서관까지의 이 산책로를 사랑했다. 선생은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고 한적할 뿐만 아니라 푸른 나무들로 싱그러운 이 길이 마음에 들어 2000년 서울 갈현동에서 고양 화정동으로 이사를 왔다.
2013년 12월 24일의 사진. 선생은 강아지 '우저'를 귀여워했다. 최인훈 선생은 대부분 집 밖을 나가지 않지만 강아지 산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은빛마을 아파트를 나와 바깥공기를 쐬었다. 사진=최윤구 

아내 원영희씨는 “우리 두 사람은 도심에 자리한 공원과 우거진 숲을 좋아했어요. 막상 와보니 사람들도 다 소박하고 좋은 거예요”라고 추억했다. 

선생은 아내와 함께 이 산책로를 거니는 것을 제외하고 거의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호수공원은 아내와 함께 꽤 자주 들른 장소였다. 선생은 확 트이고 널찍한 호수를 벤치에 앉아 한참 바라보다가 “참 좋은 데야…”라며 나직이 읊조리곤 했다.  

특히 해마다 5~6월 개최되는 일산호수공원 장미축제에는 어김없이 찾았다. 같은 일산호수공원에서 열리는 고양국제꽃축제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는 이유로 찾지 않았지만 장미축제 만큼은 꼭 챙겼던 것이다. 선생은 꽃 중에 장미, 모란, 튤립을 좋아했다. 장미 중에서도 흑장미를 무척 사랑했다.

선생은 가끔 아내와 함께 호수공원을 즐겨 찾았다. 사진은 2014년 8월경의 것으로 선생이 호수공원에서 걷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 최윤구

 

 

최인훈 선생은 장미, 모란, 튤립을 좋아했다. 장미를 좋아했기 때문에 해마다 5~6월 개최되는 일산호수공원 장미축제에는 어김없이 찾곤 했다. 사진은 5월 27일 아내 원영희씨와 호수공원 장미원에서 촬영된 것이다.
사진 = 최윤구.

삶을 관조하며 글을 읽고 쓰기에 은빛마을 집만큼 좋은 데 없어 
서울 갈현동 시절, ‘화두’를 쓸 당시 최인훈 선생은 꼬박 1년 동안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2000년 고양 화정동으로 이사온 후에도 1년 동안 두문불출한 적도 있다고 한다. 1977년부터 2001년 5월까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임했던 시절에는 집 밖에 머무는 시간이 그나마 많았지만, 화정 은빛마을 5단지 아파트에서의 삶은 거의 ‘은둔’에 가까웠다. 아들인 최윤구씨는 “1년 칩거 끝에 나온 아버지가 햇빛을 받으며 서있는 모습은 독방에 갇혀 있다가 나온 죄수의 그것처럼 부스스한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선생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삶을 마냥 ‘은둔’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세속의 영욕을 멀리 하고 삶을 관조하며 글을 읽고 쓰고 생각하는 삶, 그야말로 ‘선승 같은 삶’을 지향했던 선생에게 집만큼 안성맞춤인 공간은 없었다. 

최윤구씨는 “당신께선 항상 선승같은 삶을 지향했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고양에서의 18년이 가장 선승같은 삶에 걸맞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집, 독서·사색·집필의 역동적 공간. 1년 이상 두문불출하기도   
최인훈 선생에게 집이란, 집 이상의 공간이었다. 폭넓은 독서의 공간이자 깊은 사색의 공간이자 치열한 집필의 공간이었다. 작품을 구상하는 공간이었고, 작품을 쓸 때 느끼는 고통과 희열이 생성되었다 소멸하는 공간이었으며, 마침내 작품이 탄생하는, 작가로서는 비할 데 없이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어떻게 보면 선생에게 집은 식당이자 숙소이자 도서관이자 공부방이자 휴식처이자 밀실이자 광장이었다.

최인훈 선생에게 집이란 집 이상의 공간이었다. 폭넓은 독서의 공간이자 깊은 사색의 공간이자 치열한 집필의 공간이었다. 사진은 화정 은빛마을 아파트 자택 거실 공간이다.
최인훈 선생은 한국 근대정신사 최고의 봉우리 중 하나에 그의 문학이 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다. 이런 평가를 받는 작가의 내면에 믿기지 않을 정도의 순진무구함이 스며있었던 것이다. 그가 살아생전 어린아이처럼 모아놓은 인형들을 보면 그렇다. 특히 모스크바에서 가져온 러시아 전통 목각인형인 마트로시카가 많이 보인다.
선생이 어릴 적 아들인 최윤구 음악평론가에게 사다준 장남감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점 중 하나, 바로 아내와 함께 하는 공간이었다. 선생은 집 밖의 외식보다 집 안에서 아내가 차려주는 소박한 밥상을 더 원했다. 담배는 태웠지만 술은 아예 입에 대지 않았다. 1997년경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는데, 의사는 도무지 병명을 알지 못했다. 입원한 원인이라곤 오로지 담배밖에 없다고 스스로 생각해 그 이후부터는 담배마저도 끊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집 밖에서 누릴 수 있는 대부분을 온전히 집 안에서 누리는 것이 가능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언제든 탐독할 수 있는 책이 집 안 곳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선생은 누구보다 깊고 폭넓게 책을 읽었다. 분자생물학 등 자연과학 책들도 탐독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SF소설가이자 미래학자인 아서 C. 클라크의 작품들도 꿰고 있었다. 선승 같은 삶을 지향했던 이답게 말년에 가장 아끼셨던 책 중 한 권은 『중국의 은자들』이었다.

독서는 선생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선생의 독서 흔적을 책 마다 남겼는데, 흥미로운 점은 한 번 읽었을 때와 읽은 책을 또한 번 읽었을 때 각각 다른 색깔의 밑줄을 긋는다는 점이다. 이 책은 『20세기 우리 역사』라는 책이다.

엽편소설 분량의 미발표작, 모두 고양 화정에서 집필 
최인훈 선생은 2000년 고양 화정으로 이사온 후에는 소설이든 희곡이든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발표한 작품은 2003년 <황해문화>에 발표한 단편소설 ‘바다의 편지’가 유일하다. 

그런데 미발표 작품들은 모두 고양 화정에서 집필했다. 장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편도 아닌, 아주 짧은 분량의 콩트 혹은 엽편소설 분량의 글들이었다. 며느리인 하윤나씨는 ‘화정 가을밤에’ 등 32편의 미발표작을 모아 책을 만들어 아버님께 선물하기도 했다. 

엽편소설 분량의 미발표 작품들을 모아 놓은 봉투. 선생은 미발표작품을 모두 고양 화정에서 집필했다.
선생이 쓴 희곡작품의 육필원고.

아들인 최윤구씨는 “미발표작을 모아 만든 책이 딱 두 권인데, 한 권은 아내가 아버님께 선물해드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희 집에 있습니다. 미발표 작품들의 주제가 다양한데, 어떤 것은 SF라고 할 만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판타지라고 할 만한 것도 있어요. 그리고 ‘시대의 서기’를 자임하시느라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미학적 실험을 마음껏 펼친 작품도 있구요”라고 설명했다.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 고양, 병실에서도 여전했던 관찰력 
최인훈 선생에게 고양은 84년 생애 중 맨 뒷부분 18년을 보낸 곳이다. 1년 남짓 서울예대 문창과 교수로의 삶을 보냈고, 교직 은퇴 후에도 계속 고양에 머무르게 되는데, 그 기간이 17년이 넘는다. 무엇보다 고양은 끊임없이 읽기와 쓰기와 사유로 점철된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저의 할아버지가 특별히 운동을 하시는 분이 아니었는데 94세까지 사셨어요. 깡마르고 연약해 보이는 분이었죠. 아버님도 그 정도 사시겠거니 했는데 대장암 진단을 받았어요. 황망했습니다.”

아들 최윤구씨의 말이다. 대장암 진단은 온 가족이 이미 사그라들고 있었던 최인훈 선생의 생명을 부여잡게 만들었다. 의사는 수술이 불가능하니 항암치료를 건의했다. 혹독한 2차 항암치료까지 받은 선생은 몸에 무리가 와서 걸을 수 없게 됐다. 그는 살아생전 그토록 사랑했던 곳, 가족들이 있고 책이 있었던 정든 곳, 바로 화정동 집에서 눈을 감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결국 그나마 집에 가장 가까운 큰 병원이었던 명지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최윤구씨는 “처음에 4인실에 입원했어요. 1인실 자리가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저는 아버님을 계속 4인실에 모셔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게 됐어요. 4인실에는 입원한 이들 중에 초등학생 정도의 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숨을 헐떡이면서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겁니다. 아버님은 참 딱하게 여기셨어요. 놀랍게도 그때까지도 소설가로서의 그 날카로운 관찰력이 작동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마 그 아이와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졌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1인실로 옮겨버리면 생명이 소실점으로 향하는 본인밖에 관찰 대상이 남지 않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선생은 명지병원 1인실로 옮겨졌고 눈을 감았다. 최인훈 선생이 태어난 곳은 함경북도 회령이었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가족과 함께 월남해 70년 가까이 남한에서 생활했다. 각박했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안착해 생을 마감한 공간은 결국 고양이었다. 냉전 이데올로기 극복을 지향하는 작품부터 설화를 바탕으로 한 희곡까지 숱한 작품을 남긴 작가이자, 수많은 문인들을 길러냈고 여러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스승이자, 가정에서는 살가운 남편이고 아버지였던 최인훈이라는 거목이 누웠던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