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의 선물, 멜 뎀뿌라의 기억이 담긴 '나의 성산포'

새해 읽을 만한 책 - 임영근 작가의 『일출봉에 부는 바람』

2022-01-10     고양신문

제주도에서 성장한 기억 더듬어 
‘나만의 이야기’로 풀어낸 글들 
옛 성산에 대한 세밀한 수채화 

새해 읽을 만한 좋은 책이 한권 나왔다. 신년의 각오를 다지게 하는 자기개발서가 아니다. 제주에 가고 싶고, 제주 음식을 먹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그래서 올해는 제주에 꼭 한번 가야겠다고 마음먹게 한다. 성산에서 자란 작가는 멜 뎀뿌라, 몸국, 잔칫집 도새기고기, 수매밑 홍해삼, 빙떢 등 제주의 음식에 대한 기억을 담백하고 재밌게 건넨다. 매일 뛰어 놀았던 성산일출봉과 수매밑 바다도 세밀화처럼 담겨져 있다. 작가의 기억과 기록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는 성산이다. 제주에 대한, 성산에 대한 수많은 글들 중 이보다 더 재밌고 단아한 글은 드물어 보인다. 경험했던 시간과 공간을 섬세하게 기억하고 풀어내는 작가의 감성이 탁월하다.

임영근 작가는 고양의 인문학모임 귀가쫑긋의 회장으로 일했고, 지금은 생명과 건강에 대해 공부하고 실천하는 시민모임 건강넷의 회장을 맡고 있다. <일출봉에 부는 바람(파라북스 출판)>은 인문학모임 문학반에서의 습작을 엮고, 더해 펴낸 책이다. 오랜 시간 출판인이자 편집인으로 일했던 작가는 스스로 책을 내는 일을 상상해보지 않았다. 청년시절 받았던 한 장의 편지를 아직도 마음 한편에 담고 있었던 아내 강영임씨가 적극 권유하며 책이 나오게 됐다. “첫 편지를 받고, 남편의 문학적 감성과 자질에 매료됐다는 강씨는 언젠가 남편이 책을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문학반 습작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작가는 다른 사람의 글을 빛내는 일은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 글을 쓰는 일은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내 머릿속의 기억, 세상 하나뿐인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책을 펴내고 보니, 누구라도 나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의미를 찾게 됐다.

습작이라지만, 물이 흐르듯 유연하고 담백한 사색이 담긴 문장 덕분에 저자의 기억 속으로 푹 빠져들게 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성산 일출봉의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것 같다. 책 소개는 저자와 함께 문학반에서 글공부를 했던 홍유경씨가 한다. 약사로 일하는 홍유경씨도 문학반 습작을 통해 시인이 됐다.                                                                                                                              -편집자 주-

 

[고양신문] 얼마전 우연히 ‘아이디어 리그’라는 방송을 보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가 발전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예비 멘티 로 선정된 지원자들이 공개방송오디션 을 통해 경합을 벌인 후 최종 선발되 면 포상금과 함께 방송에서 심사를 맡 았던 유명기업경영자 멘토들의 멘토링 지원을 받는 특전이 주어지는 프로그 램이었다. 

이 중 특별히 눈길을 훅 잡아끈 아 이디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중학교 2 학년 여학생이 창안하고 프리젠테이 션 한 ‘코리아 게임’이었다. 지방소멸해 법으로 관광활성화 방안을 제시했는 데, 각 지역 축제를 디지털게임으로 부 활시켜 젊은 층이 방문할 수 있게 유 도한다는 요지다. 구체적인 예시로 그 학생의 할머니 댁이 있는 전남 강진의 섬 가우도의 풍어제를 들었다. 500년 된 팽나무 밑에서 지냈던 풍어제가 나 무가 고사한 뒤 사라졌지만, AR(증강 현실)기술을 이용해 섬에 팽나무를 복 원한 뒤 나무에 달린 물고기를 잡는 P2E(play to earn)게임을 즐기게 해 방문 동기를 제공하고 현장에서 지역 의 실제적인 진면목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난제인 수도권 집중화 문제에 대해 스마트하고 유쾌한 해법 을 들고나온 이 어린 학생의 똘망함도 감탄스러웠지만, 보다 깊은 곳에서 터 져 나온 탄복의 마음은 학생의 아버지 역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딸과 함께 고향집을 방문했을 때 지방 농어촌 마을 강진이 당면한 문제점과 지방의 역사문화 스토리를 전달함으로써, 기성세대 키워드인 ‘지 방 소외’ ‘지역 축제’ 와 자녀 세대의 키 워드인 ‘디지털 게임’ ‘NFT’가 연결될 수 있도록 스토리 메신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역할 덕분에 낯선 두 개의 영역 에 소통의 채널이 형성되고 기존 문제 에 대한 신선한 답안지가 나올 수 있 지 않았을까?

사실 이렇게 긴 서두로 운을 뗀 이유 는 나도 좋은 스토리텔러를 소개하는 스토리 메신저가 되고 싶어서이다. 산 문집 『일출봉에 부는 바람』을 출간한 스토리텔러 임영근 작가는 제주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서울대 철학과에 진 학해 학생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했 으며 현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의 상 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산문집을 읽으며 질박하고 생 동감 있는 그의 문장을 좇아가다 보 면 그와 더불어 제주 멸치 튀김 ‘멜 뎀 뿌라’의 고소함을 한입 가득 머금고 있 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의 표 현처럼 우리 공동체가 “지난 시절의 일 을 더 큰 맥락에서 이해하고, 살며 책을 읽으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 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이야기를 회 복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에서 부터 시작될 수 있으리라. 마치 ‘오징어 게임’이 그러했듯. 옛날이야기에는 미 래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오래된 지 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일출봉에 부는 바람』은 낮은 목소 리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조곤조 곤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오래 끓 인 자연산 돌미역처럼 깊은 맛의 통찰 이 우러난다. 작가는 그토록 보고 싶 었던 고래를 결국 한번도 보지 못했지 만 그 시절 맛나게 먹었던 멜 뎀뿌라 는 아마도 “고래에 쫓겨 바닷가로 몰려 들었던 멸치떼”였으리라고 회상한다. 차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고래의 선물이었다고. 

코로나로 촉발된 현재 진행형 매머 드급 변화의 물결은 마치 다른 사람들 은 다 목격했으나 나에게만 실체가 잡 히지 않는 고래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 는 우리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공부하는 것 만큼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삶 이 만들어 온 흔적을 기억하고 그 맥 락에서 파생된 수많은 문제와 도전을 창발적 아이디어로 연결시키는 일이아 닐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분리된 것 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 이다. 

 새해 첫 가족 프로젝트로 청소년 자녀들과 함께 임영근 작가님의 산문 집 『일출봉에 부는 바람』의 한 꼭지를 읽고 브레인스토밍을 해보면 어떨까? 부모 감성이 빚어낸 풍경과 자녀 감성 이 호출한 통통 튀는 발상이 부대끼며 만들어낸 낯선 조화가 오미크론으로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임인년 호랑이 해의 문을 여는 신선한 윤활유가 되어 주리라 기대하며 제안해 본다.             

                              글,  홍유경  시인(약사)